국적 : 미국
출생 : 1940년 4월 25일
키 168cm 출생지 : 미국
데뷔 : 1969년 영화 Me, Natalie
수상 경력 :
1969년 토니상
1993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2004년 골든글로브 미니시리즈/TV영화부문 남우주연상
연극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한 알 파치노는 1969년 처음 영화배우로 데뷔한 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거물급 연기파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배우, 감독 겸 작가. <대부> 3부작에 출연한 뒤 영화배우로서 확고히 자리를 굳힌 그는 최근작 <에니 기븐 선데이>까지 영화와 연극을 오가며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1940년 4월 25일 뉴욕시의 이스트 할렘에서 보험외판원인 이탈리아 출신 아버지 살바토레와 어머니 로즈 사이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두살되던 때 이혼하여 알 파치노는 어머니와 함께 빈민가에 있던 외할아버지 댁으로 가게된다. 감수성이 풍부한 어린 시절의 알 파치노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과잉보호로 7살이 될 때까지 거의 집밖에 나가지도 못했다고 한다.
초등학교때 그의 재능을 알아본 선생님의 배려로 연극에 출연한 것을 빼고는 평범한 시절을 보냈던 그는 후에 연기예술학교로 옮겨간다. 하지만 오로지 영어에만 흥미를 느꼈던 알 파치노는 17살에 학교를 중퇴하고 그후 몇 년간 빌딩 수위나 사무실 우편배달부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한다. 하지만 그는 다시 연기수업을 받기 시작하고 조그만 무대에서 활동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돈을 모은 알 파치노는 허버트 배르그호프 스튜디오에 등록하고 드라마 선생 찰리 라우톤 아래서 본격적인 연기수업을 받게된다.
본격적인 연기수업으로 연기자의 길을 걷게된 알 파치노는 연극무대에 참여, 드디어 <호랑이는 넥타이를 매는가? (Dose a tiger wear a necktie?)>라는 연극으로 브로드웨이에 데뷔하여 호평받는다.
연극무대에서 연기경험을 쌓은 그는 대부분의 연극배우들처럼 영화에 출현하게 된다. 1969년 영화 <나, 나탈리 (Me, Natalie)>의 조그만 역으로 출발한 알 파치노는 연극연출도 하는 한편, 1971년 두번째 영화 <백색공포>에서 일약 주인공을 맡게된다. 그는 이 영화에서 마약중독에 빠지는 뉴욕의 풋내기 예술가 역을 잘 소화해 낸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해에 출연한 영화가 바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대부>. <대부>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말론 브란도), 최우수 작품상, 각색상을 수상하였고 이 영화에서 알 파치노는 돈 꼴레오네(말론 브란도)의 막내 아들 마이클 꼴레오네 역을 맡아 대선배 배우 말론 브란도 못지 않은 연기를 보여주어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다. 알 파치노는 이후 <대부> 2편과 3편에서 모두 주연을 맡아 <대부 2>의 연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다.
<대부>의 성공 이후 <뜨거운 오후>, <스카 페이스>, <광란자> 등에 출연하며 시드니 루멧, 윌리엄 프레드킨, 브라이언 드 팔머와 같은 쟁쟁한 감독들과 일을 하게된다. 하지만 그가 출연한 영화들은 흥행적으로는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대신 비평가들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나 나중에 명작으로 인정받은 <스카 페이스>와 <혁명> 두 편이 잇달아 흥행에 참패하여 89년까지 영화계를 한동안 떠난다.
그러나 89년 스릴러물 <사랑의 파도>로 재기에 성공한 그는 그 다음 영화 <딕 트레이시>로 다시금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 된다. 그리고 1992년은 알 파치노에게 최고의 해가 된다. 그는 <글렌게리 글렌 로스>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에, <여인의 향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동시 노미네이트되고 드디어 남우주연상을 거머쥔다. 그에게 이것은 유난히 상복이 없던 그에게 8번의 노미네이트만에 수상한 오스카가 되었다.
1993년에는 <스카 페이스>로 인연을 맺은 브라이언 드 팔머 감독의 영화 <칼리토>에 전직 마약상으로 출연하는 하고 1995년, <히트>에서는 또 한명의 거물급 연기파 배우 로버트 드 니로와 뜨거운 연기대결을 펼치며 호연을 보여준다. <씨티 홀>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알 파치노는 세익스피어의 '리차드 3세'를 영화화한 <뉴욕광시곡>을 직접 감독, 연출, 연기하고 이 영화는 미국감독협회상을 수상한다.
99년 올리버 스톤 감독의 <애니 기븐 선데이>와 비록 한 부문도 수상하지 못했지만 아카데미 7개 부문 후보에 오른 영화 <인사이더>까지 60세의 나이가 무색할만큼 정력적인 배우활동을 하고 있다.
로버트 드 니로
국적 : 미국
출생 : 1943년 8월 17일
신장 : 175cm
수상 경력 :
1981년 골든글로브 드라마부문 남우주연상
1981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1990년 전미 비평가 협회상 남우주연상
1943년 8월 17일 뉴욕 출생. 이태리 이민인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연기를 지망해 60년 초에 스텔라 애들러 예술 학교에 들어가서 스바니슬라브스키 연기법을 배웠는데 대사와 인물을 분석하는 비법을 터득했다. 액터스 스튜디오를 거쳐 1968년 <블루 맨하탄 2>에서 처음으로 큰 배역을 맡았다고 한다.
그가 처음 출연한 3편의 영화 <그리팅스>, <결혼 파티>, <안녕하세요 엄마>는 모두 브라이언 드팔마가 연출했다. 73년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로 주목을 받았고 <대부>의 소니 역으로 스크린 테스트를 받았으나 떨어졌다. 그러나 속편에서 젊은 비토 꼴르네오네의 역을 맡아 늙은 비토였던 마론 브란도의 특징과 시실리아 사투리, 거슬러 올라가 유추하는 방법을 통해 스크린에 경악을 가져 주었다. 그것으로 그해 첫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그후 이어지는 그의 연기경력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1900년>(76),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76), 마이클 치미노의 베트남의 경험에 대해 해부한 <디어 헌터>(78) 등의 명작에 출연했다. 그에게 두번째아카데미 상을 안겨준 마틴 스콜세지의 <분노의 주먹>에서 권투선수 제이크 라모타 역으로 나와 50파운드를 늘였다가 줄였다.
80년에는 <고백>에서 마이클 듀발과 공연하고, 83에는 스콜세지 영화 <코메디의 왕>에서 행운만 잡으면 최고의 코메디언이 되리라 확신하는 루퍼트 펍킨으로 나왔다. 84년에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펀 어 타임 인 어메리카>에 나와 유태인 갱에 대한 드니로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고 86년에는 롤랑 조페의 역작 <미션>에서 제수이트 제단의 사제로 출연했으며 87년에는 드팔마의 <언터쳐블>에서 인상적인 악당 역할을 했다.
그의 다음 변모는 마틴 브레스트의 코메디 <미드 나잇 런>과 <천사탈주>, <좋은 친구들>, <사랑의 기적>으로 그의 명작 행진은 계속되었다. 91년에도 <분노의 역류>에 출연했으며 다시 스콜세즈 감독의 작품에 출연한 서스펜스 드라마 <케이프 피어>도 호평을 받았다.
그는 어떤 역할도 소화할 수 있는 뛰어난 연기력과 좋은 역이라면 조연도 마다않는 성실함으로 정상의 위치를 오랫 동안 지키고 있다. 제작에도 여러편 참여했으며, <브롱스 이야기>를 통해 감독으로도 데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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