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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3일 토요일

[시나리오] 박하사탕


박하사탕
PEPPERMINT CANDY                         
이창동 각본 / 감독
(주) 이스트 필름
1. 타이틀 백 ----------------------------------------------------------

                 (천천히 다가오는 하늘, 산, 그리고 숲들.
                 카메라 내려오면, 달리는 열차의 정면에서 보는 시점.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끝없는 철도 침목들, 선로 좌우의 풍경들.
                 오래 계속되다가 이윽고 화면은 터널의 어둠으로 빨려 들어간다.
                 타이틀백이 끝난다.
                 어둠 속에서 레일을 밟고 달리는 열차의 바퀴소리만 들리다가 천천히            잦아들며……F.O.)

2. 작은 타이틀 (무지) ──────────────────────────
                                                                         
                 (어둠 속에서 '야유회'라는 자막이 떴다가, 이윽고 사라진다.
                 다시 '1998년 가을.'이라는 자막이 떴다 사라진다. 글자들이 사라지는            모습은 마치 바람에 천천히 풍화되어 가는 듯한 모습이다.)
                                    
3. 야외 (외부. 낮)------------------------------------------------------

                 (F.I. 되면, 경기도 북쪽의 어느 한적한 강변. 특별히 눈에 띌 만한 것            없는 한적하고 평범한 풍경이지만 가을빛은 그런대로 아름답다.)

                 (먼지를 일으키며 차들이 다가와 멈춘다. 두 대의 중고 승용차와 봉고           차에서 사람들이 내린다.
                 삼십대 후반에서 사십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열명 내외의 남녀들. 적                  당히 세파에 때묻고 배가 나오거나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한, 잘나거                  나 내세울 것 없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다. 겉모습만 봐서는 어느            변두리 시장 번영회 같은 곳에서 단체로 야유회를 나온 사람들 같다.
                 그들은 수선스럽게 떠들며 차에서 먹을 것과 가라오케 기계 같은 것                  을 내린다.)

남자1   여기가 맞냐?
남자2   저 윗쪽으로 가야 되는 거 아냐?
여자1   (호들갑스럽게) 어머, 옛날 그대로네. 여기 오니까 금방 알겠어.
남자3   (운전석에서 내리며) 여기 맞지? 틀림없다고 그랬잖아.
남자4   (남자3을 가리키며) 얘가 딴 건 몰라도 길 하나는 기가 막히게 찾아                  요.
남자3   그럼, 임마! 운짱 경력이 15년인데.
여자2   강은 어딨어요? 그때 우리 강가에서 놀았었잖아.
남자1   (벌써 저만치 가서 소리친다.) 어이, 이리 와! 이쪽이야!
남자2   아지매들, 뭐 해?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와요!
여자3   저 아저씨는 말끝마다 아지매래.

                 (그들은 놀이기구와 먹을 것을 들고, 낄낄거리고 떠들며 걸어가기 시                  작한다.
                 이윽고 언덕 끝에 이르면, 언덕 아래로 강이 보인다.
                 강은 그리 넓지도 깊지도 않아 보이는데, 주변에는 자갈밭이 펼쳐져                   있다. 뒷쪽으로는 별로 크지 않은 낡은 철교가 보인다.)

여자2           어머, 어머, 정말 거기야. 20년이 지났는데 어쩜 그대로 있냐?
남자4           그대로지 그럼, 강이 어디로 가요?
여자2           우리가 여기 온 게 꼭 20년 전이잖아요. 20년 지났는데, 꼭 어제 왔던            것 같애. 
남자2           어제 만났다 헤어졌는데, 하룻밤 사이에 아지매들 어째서 이렇게 폭                  싹 맛이 가버렸소?
여자3           아이고, 그러는 자기는?
남자1           여기로 오자고 한 거 잘했지? 응, 잘했지? 20년 전에 우리 여기 처음            소풍 왔었으니까, 여기 딱 오니까 옛날 생각 나잖아. 옛날 가리봉동                    시절로 딱 돌아가잖아. 수안보 온천 같은 데로 가면 뭐 하냐? 사람들            바글거리는데……
남자5           수안보 얘기 내가 했냐? (남자 6을 가리키며) 얘가 했지. 얘가 입만                   벌리면 온천 노래를 불렀지.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그들은 비탈길을 따라 강으로 내                  려간다.)

4. 강변(외부, 낮) ------------------------------------------------------

                 (비닐 돗자리를 깔고 가라오케를 설치하며 판을 벌일 준비를 하고 있                  는 사람들.
                 가라오케의 소리를 시험하는 동안, 벌써 성급하게 춤솜씨를 과시하는            자도 있다.)

                 (어수선한 그들의 모습 뒷쪽 멀리 한 사내가 홀로 서 있는 것이 보인                  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에게 신경쓰지 않고, 심지어 관객들조차 처음                  에는 그를 의식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분위기를 돋구어 놀기 시작하는 동안에, 사내는 서                  서히 사람들 쪽으로 다가온다.)

                 (사람들이 노는 모습은 그 나이 또래 한국사람들의 야유회가 흔히 그                  런 것처럼 어색하면서도 소란스럽고, 적당히 유치하면서 뻔뻔스럽기                  도 하다.
                 여자1의 손을 억지로 붙들고 춤을 추는 머리 벗겨진 남자1,
                 어울리지 않게 허리를 흔들며 노래 부르는 여자2,
                 벌써 술이 취해 떠들어대는 남자2 등등.
                 그런 그들의 곁으로 사내가 천천히 다가온다. 30대 후반이거나 40 정                  도 되어 보이는 나이다.)

남자 6 (수상스러울 만큼 슬그머니 다가오는 사내에게 경계의 시선으로 힐끔                  거리다가) 어, 너…… 영호 아니야? 김영호!
남자 1 그러네, 김영호네!

                 (그제야 다른 사람들도 비로소 그를 알아본다.)

남자 6 야, 임마. 그 동안 대체 어디서 뭐 하고 있었냐?
  영호 그래도 다들 날 기억하네.
남자 2 기억하지, 그럼. 얼마나 됐다고. 20년밖에 더 됐냐? 강산이 두 번밖에            더 바뀌었냐?
여자 1 안녕하세요, 김영호씨.
여자 2 정말 오랜 만이네요.
남자 2 이 아지매 기억나냐? 맨날 야학 와서 잠만 자던 정옥순, 이 아지매는            개구리입 김미화.
여자 3 이미화야.
남자 2 그렇지, 이미화. 이 아지매는 여드름박사 신정자, 지금은 버스회사 사                  장님 싸모님 되셨어요.
남자 1 너 여기 어떻게 알고 왔냐? 너한텐 연락도 못했는데……

                 (친구들의 인사와 물음이 쏟아지지만, 영호는 별로 말이 없다.
                 그의 모습은 이런 자리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옷차림은 왠                  지 모르게 거칠어 보이고,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그의 표정이나 눈빛                  이다. 그의 눈빛은 어떻게 보면 약간 얼이 빠져 있는 것도 같고, 반대                  로 알 수 없는 섬뜩한 열기를 담고 있는 것도 같다.)

남자 5 자, 우선 이리 앉아. 앉아서 술이나 한 잔 합시다.
남자 1 (영호에게 술을 따루며) 우리도, 너한테 연락해볼라고 했는데, 연락이            돼야지.
  영호 미안하다.
남자 1 미안하긴, 연락 못해 내가 미안하지.
남자 6 얘가 우리 친목계 회장이야.
  영호 그러냐? 출세했네? 어쨌든, 미안하다.
남자 5 뭐가?
  영호 미안해.
 
                 (그 동안 다른 사람들은 계속 춤추고 노래하고 있다. 열기는 점점 고                  조되어 간다. 영호, 그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여자3, 노래하고 있다. 얌전을 빼며 부르고 있으나 끼가 다분하다. 사           람들이 그 여자의 주위에서 춤을 추고 있다.
                 그녀의 노래가 끝나자, 갑자기 영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빼                  앗아 든다.)

  영호 (노래한다. 산울림의 <나 어떡해>) 나 어떡해, 너 갑자기 떠나가면…                 
                 (그는 자기 기분에 취해 악을 쓰듯 노래 부른다. 거기에다 잔뜩 멋부                  린 제스츄어까지 곁들인다. 그의 모습은 아무래도 도가 지나친 듯 보                  인다. 마치 태엽이 너무 감겨서 제멋대로 돌아가는, 파열 직전의 자동                  인형을 보는 것 같다.)

  영호 그건 안돼. 정말 안돼. 가지 말아……

                 (노래하면서 그는 친구들의 술자리를 엎지른다. 친구들은 그런 그가                   몹시 신경에 거슬리면서도 오랜 만에 가진 야유회 분위기를 깨지 않                  으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미 영호의 노래는 가라오케 반주와는 맞                  지 않는다. 그는 반주를 무시하고 혼자서 제멋대로 부르고 있다.)
 
  영호 사랑했던 네가…… 다정했던 네가…… 그럴 수 있나……

                 (가라오케 반주는 꺼졌는데 그 소절만 절규하듯 계속 부르는 영호. 친           구4가 마이크를 뺏으려 한다.)

남자 4 자, 열창하느라 수고하셨고, 다음에 모실 카수는……

                 (그러나 영호는 계속 마이크를 붙들고 "다정했던 네가……"를 절규하                  며 빼앗기지 않으려 하지만, 결국 뺏긴다. 여자1이 노래하기 시작하                  고, 영호는 그 노래에 맞춰 춤을 춘다. 윤수일의 <아파트>.)

여자 1 별빛이 흐르는 하늘을 보며……

                 (다른 친구들도 함께 춤을 춘다. 영호의 알 수 없는 광기는 점점 심해           지면서 괴성을 지르며 주변 자갈밭을 뛰기 시작한다. 물이 말라버린                   강에 뛰어들어 첨벙거리며 춤을 추다가 미끄러져 자빠지기도 하고,                   다시 소리를 지르며 달리기도 한다.)

남자3           저 친구 대체 왜 저래? 미친 거 같이.
남자2           옛날엔 얌전한 놈이었는데 완전히 또라이 다됐네.

                 (계속 놀고 있는 사람들. 뒤쪽으로 멀리 철교가 있는 언덕 위로 기어                  오르는 영호의 모습이 보인다.)

                 (어느새 그는 철교 위에 올라가 있다.
                 철교 위에서 여전히 장난하듯 우스꽝스런 모양으로 춤을 추고 있다.)

여자 4 저 사람 왜 저래요? 말려야 되는 거 아녜요?
남자 2 내비 둬. 저러다 말겠지 뭐.
남자 5 잘됐어, 우리끼리 놀자. 저 친구 없으니까 인제 좀 조용하네.
남자 3 다음 타자 누구야?
여자 1 그래도 위험하잖아. 내려오라고 해요.
여자 2 맞아요. 떨어지면 어떡해? 술도 취한 것 같은데.
남자 1 (영호에게 손짓하며 소리친다)어이! 내려와!

                 (그러나 영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제 그는 철교 가운데에 서서 무           엇인가 소리지르고 있다.)

여자 2 (웃으며) 자기도 소리지르네. 야호 하자나 봐.
남자 5 야아── 호오──!

                 (철교 위 영호도 계속 무엇인가 소리지르고 있다.)

남자 2 (소리 지른다) 내려와!
남자 3 (소리 지른다) 내려 오라구우!

                 (여자들이 웃는다. 서로를 향해 소리지르는 모습이 무슨 장난을 하는            것 같다.)

남자 6 (소리 지른다)내려와, 새끼야아!
여자 2 욕 하지마요.
남자 5 욕하는 게 들리나?
남자 3 욕하는 줄 알면 화가 나서 쫓아내려오지 않을까?
남자 6 내려와아──! 이 미친 새끼야아!

                 (영호의 외침은 점점 절박해 보인다. 그런데도 친구들은 그가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다. 그때 멀리서 열차의 기적소리가 들려온다.)

남자 1 어, 이게 무슨 소리야?
여자 1 기차예요!

                 (다시 들려오는 기적소리.)

남자 2 맞다, 이거!
남자 3 저 새낀 못 들은 거 같은데.
여자 2 어머, 어떡해. 빨리 내려오라고 해요.
남자 4 장난이 아니잖아! 야! 내려 와!

                 (영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무엇인가 외치고 있                  다.)

남자 5 야! 기차야! 내려와, 새꺄!
남자 6  내려 와! 기차! 기차!

                 (사람들은 다급하게 손을 흔들고 소리치며 철교 쪽으로 뛰어간다.)

                 (그러나 영호는 여전히 철교 한가운데에 서서 두 팔을 높이 쳐든 채                   소리지르고 있다. 더욱 가까워진 기적소리.)

5. 철교 아래 (외부, 낮) ─────────────────────────

                 (철교 아래로 달려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극단적인 부감으로 보인다.
                 이제는 기적소리가 아니라 기차가 달려오는 소리까지 들린다.)

남자 1 (철교 위를 쳐다보며) 내려와!
남자 6 늦었어, 늦었어. 언제 내려와.
남자 5 저 친구 정말 죽을려는 거 아냐?
여자 6 엄마, 어떡해? 어떡해?

                 (기차 소리는 더욱 가까워지고, 사태는 분명해졌다. 철교 한 가운데                   서 있는 그가 이제는 도망치려고 해도 이미 시간이 늦어버린 것이다.)

남자 2 뛰어내려!
남자 3 야! 뛰어내려! 괜찮아! 뛰어내려!

6. 철교 위 (외부, 낮) ──────────────────────────

                 (철교 한 가운데 서 있는 영호.
                 그 자리에 꼼짝않고 선 채 말없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철교 아래에서 뭔가 아우성치는 친구들. 극단적인 Long Shot.
                 점점 육박해오는 기차소리.)

7. 철교 아래 (외부, 낮) ─────────────────────────

                 (경악한 사람들의 얼굴 위로 요란한 기적소리와 열차의 바퀴소리가                   육박해온다.
                 기차가 이제 막 철교에 들어섰다. 이제 그 무엇도 기차의 진행을 막                  을 수는 없다. 기적소리 계속된다.)

8. 철교 위 (외부, 낮) ──────────────────────────

                 (천천히 하늘을 쳐다보는 영호의 얼굴. CLOSE UP.
                 다시 뭔가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그 소리를 기차의 요란한 기적소리                  가 덮어버린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절규하는 그의 얼굴에서 STOP.)

                 (천천히 Fade out 된다.
                 화면이 어두워지면서 기차소리는 점점 낮아진다.)

                 (수초 동안의 암전 상태에서 기차 소리가 사라지며 맑고 잔잔하며 평                  화로운 음악이 흐르기 시작한다.)

9. 달리는 열차 (외부, 낮) ────────────────────────

                 (짧은 F.I.과 함께,
                 달리는 열차의 정면에서 보는 시점 샷.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끝없는 철도 침목들과 선로 좌우의 풍경들. 자                  세히 보면 풍경 속의 움직임이 거꾸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테                  면, 하늘을 나는 새떼들이 역동작으로 철로 옆 숲으로 내려앉는다. 마                  치 기차가 과거로, 과거로 달려가듯.
                 십 초 정도 계속되다가……,
                 다시 암전.)


(미리 말해두지만, 이제부터 영화는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과거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하루 전, 한달 전, 또 이년 전, 오년 전……. 그리하여 마침내 20년이라는 시간을 역류해서 마지막엔 20년 전의 어느 순간, 한 인간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답고 순수했던 때의 모습에서 멈추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마치 사진첩의 맨 뒷장에서부터 거꾸로 펼쳐보듯 한 남자의 20년 동안에 걸친 삶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점점 젊어지고, 세월이 만든 오염과 타락의 때를 벗으며 젊음의 순수함을 되찾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마치 두터운 녹을 벗겨낸 은(銀)식기가 조금씩 조금씩 그 영롱하고 맑은 광택을 드러내듯이.
이제 우리는 잃어버린 아름다움과 순수한 사랑을 찾아가는 시간여행을 시작한다.)



10. 작은 타이틀 (무지)──────────────────────────

                 (어둠 속에서,
                 '박하사탕'
                 이라는 자막이 떴다가, 사라진다. 뒤이어,
                 '1998년 가을'이라는 자막이 다시 떴다가 사라진다.)

11. 터널 안 (외부. 흐린 날, 오후)----------------------------------------

                 (강원도 항구도시로 넘어가는 어느 터널. 터널 안을 지나는 승용차                   내부에서 보는 시점 샷.
                 터널 안은 몹시 길고 어둡다. 밝은 터널의 출구가 점점 가까이 다가                  온다.)

12. 도로 (외부. 오후)---------------------------------------------------

                 (터널을 빠져나온 승용차. 도로는 내리막길이고 들녘 아래 쪽에 바다                  를 낀 작은 항구도시가 보인다.)

13. 묵호 시내 (외부. 오후)-----------------------------------------------

                 (바다를 끼고 있는 도로. 어업 공판장 같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날은 흐리고 바람이 심하게 부는 편이다. 승용차가 달려오다가 공중                  전화 부스 옆에 멈춘다.)

                 (차에서 내려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가는 김영호.
                 전화를 걸고 다시 나온다.)

14. 다방 (내부. 같은 날, 오후)-------------------------------------------

                 (묵호 시내에 있는 구식 다방의 카운터. 마담이 카운터에서 손님 한                   사람과 농담을 주고 받으며 웃고 있다.
                 전화벨이 울리고 마담이 전화를 받는다.)

마담           예, 동해다방입니다. (손님들을 향해) 손님 중에 김영호씨 계세요? 김                  영호씨!

                 (수화기를 놓는다. 김영호가 프레임 인 되어 수화기를 든다.)

15. 바닷가 도로 (외부. 같은 날, 오후)-------------------------------------

                 (바다를 따라 이어진 방파제 옆 도로. 파도가 몹시 거칠다. 주변 풍경                  은 황량하고 지나 다니는 차량도 드물다.) 

                 (차에 기대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영호. 거친 파도가 방파제를                   때리고 있다.
                 멀리서 오토바이 한 대가 다가온다. 중국집 배달용인 것처럼 보이는                   오토바이. 운전자 역시 헬멧을 쓴 중국집 배달원 같다.
                 점점 다가온 오토바이가 영호를 지나쳐간다. 영호 여전히 오토바이를            보고 있다. 저만큼 가던 오토바이가 갑자기 유턴을 해서 영호에게로                   와서 멈춰선다.)

배달원 (눈과 코만 보이는 헬멧을 쓰고 있다.)서울서 온 손님이죠?
  영호 예.
배달원 물건 주고 돈 받아 오라고 그랬는데.

                 (영호 손을 내민다.)

배달원 돈부터 주세요. 
  영호 물건 봐야지.
배달원 (잠바 안주머니에서 종이봉지에 싸인 물건을 꺼낸다.) 물건은 여깅어                  요. 돈부터 주세요.
  영호 이리 줘봐, 새꺄!

                 (영호, 물건을 뺐는다. 영호의 서슬에 배달원은 기가 질려 버린다. 봉                  지에서 물건을 꺼내는 영호. 봉지에서 나온 것은 권총 한 자루다. 영                  호, 총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그리고 배달원에게 말없이 돈을 건넨다.)

                 (떠나는 오토바이. 영호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
                 방파제를 때리는 파도가 그를 덮칠 듯하다.)

16. 고개 위 도로 (외부. 늦은 오후)---------------------------------------

                 (멀리 언덕 아래로 징그럽도록 검푸른 바다가 보인다.)

                 (영호, 차 운전석에 앉아서 바다를 보고 있다.
                 권총을 꺼낸다. 권총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총구를 자신의 머리 관                  자놀이에 대본다. 뭔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
                 손을 들어 룸 미러를 조정한다. 그리고 룸 미러를 통해 머리에 총구                  를 댄 자신의 모습을 본다. 마치 좀더 멋있는 모양을 찾듯. 그의 모습                  은 처음에는 약간 장난스러워 보인다. 이번에는 입을 벌리고 입안에                   총구를 집어넣는다. 두 눈은 룸미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다. 이윽고, 그의 손이 떨린다. 마침내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긴다.
                 찰칵, 쇳소리가 울린다.
                 입에서 총구를 빼낸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다.)

                 (난폭하게 급출발 하는 영호의 차. 그 자리를 벗어나 도로를 달려간                  다.)

17. 한강 고수부지 (외부. 낮) --------------------------------------------

                 (간이판매대 뒷쪽 쓰레기통 옆에서 김영호가 컵라면을 먹고 있다.
                 비가 막 걷힌 듯한, 또는 얼음이 녹은 듯한 검은 땅에 물이 흥건히                   고여 있다. 어디선가 꾸욱, 꾸욱, 꾸욱, 하는 이상한 소리들이 끊임없                  이 들려오고 있다. 그 소리의 정체는 영호가 컵라면을 다 먹고 자리                  에서 일어나 강 쪽으로 걸어갈 때 밝혀진다.
                 땅에 고인 검은 빗물에 비치는, 일제히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수많은                   비둘기떼들.)

                 (한쪽에 세워둔 차 쪽으로 걸어가는 영호. 한남대교 근처 고수부지의            황량한 풍경이 보인다. 검은 하늘은 비가 막 걷히고 있고, 땅은 젖어                   있다. 드문드문 자리한 간이판매대. 그 위에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는                   연. 한남대교의 교각과 공사중인 철 구조물. 사람이 없는 유람선 선착                  장.)

18. 증권사 주차장 (외부. 오후) ------------------------------------------

                 (모 증권사 건물 뒤쪽에 있는 주차장. 시점 샷.
                 증권사 직원인 최차장이 걸어온다. 카메라는 차 안에 앉은 누군가의                   시점으로 그를 따라 PAN한다. 최차장이 그의 차 옆에 멈춰서면 그를             향하고 있는, Focus Out 상태의 권총 총구가 Frame In 한다. 최차장은            차에 타기 전에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 듯, 무심히 주위를 둘러본다.)

                 (자기 차의 운전석에 앉아 권총을 겨누고 있는 영호. 총구가 조금 떨                  린다.)

                 (최차장, 차를 타고 출발한다.)

19. 도로 (외부. 오후) ---------------------------------------------------

                 (차들이 씽씽 지나가는 4차선 길.
                 길 건너에 서 있던 영호가 도로를 무단횡단해 오는 모습을 카메라가            차바퀴 정도의 낮은 angle로 잡는다. 차들이 경적을 울리는데도 아랑                  곳하지 않고 건너온다.)

20. 건물 뒤 주차장 입구 (외부. 오후) ------------------------------------

                 (승용차가 한 대 들어온다. 임사장이 탄 차다. 늙은 주차장 관리인이                   나와서 인사한다. 차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앞에                   선다. 관리인이 엘리베이터 단추를 눌러준다.)

21. 주차장 엘리베이터(내부. 같은 시각)-----------------------------------

                 (승용차의 운전석에 바라본 시점 샷. 차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자동차 전용 엘리베이터에 실려있다. 엘리베이터 작동음과 함께 차창            앞에 시멘트 벽이 보인다. 헤드라이트는 켜져 있다.)

                 (인터 캇. 운전석에 앉은 임사장. 무료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다.)

                 (시멘트 벽 아래 쪽에서 부터 철문이 서서히 올라온다. 이윽고 철문                  이 다 올라와서 멈춘다. 다시 철문이 아래쪽에서부터 열리며 뒤쪽                  의 어두운 주차장이 나타난다.
                 이 컷트는 카메라가 정지되어 있지만, 세가지로 변화한다. 시멘트벽,                   올라오는 철문, 다시 아래쪽에서부터 나타나는 주차장.
                 철문이 아래쪽에서부터 올라오며 열릴 때, 문 앞에 서 있는 어떤 사                  람의 하체가 보여지기 시작한다. 이윽고 허리가 나타나고 상체, 얼굴                  까지 나타난다. 김영호다. 그가 이쪽을 보며 팔을 쳐든다. 그의 손에                   권총이 들려져 있다.)

임사장 어, 어, 어…… 왜 이래?

                 (영호, 이쪽을 향해 총을 똑바로 겨냥한다.)

                 (공포에 질린 임, 손을 내젓다가 비명을 지르며 운전대 밑으로 몸을                   숙인다. 사이. 아무런 기척이 없다. 임, 조심스럽게 머리를 내밀어 본                  다. 주위를 둘러본다. 서서히 일어난다.)

                 (어느새 영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22. 도로 가 (외부. 오후)-------------------------------------------------

                 (도로 가에 무단주차해 있는 영호의 차.
                 차창에 붉은 글씨의 '주차위반' 경고장이 커다랗게 붙어있고, 영호가                   손으로 뜯고 있다. 그러나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의 뒤로 교통순경이            다가온다. 그러나 영호는 순경이 오는 줄 모른 채 계속 경고장을 뜯                  고 있다.)

  교통 이 차 주인이요?
  영호 (그제야 순경을 돌아본다.) 예.
  교통 여기 주차단속 구역인데. 면허증 줘봐요.
  영호 (말없이 순경을 보고만 있다.)
  교통 면허증 줘봐요.
  영호 이 차 내 차 아니예요.
  교통 이 사람 왜 이래? 아까 내 차라 그랬잖아. 면허증 내요.
  영호 ……
  교통 어차피 떼이게 돼 있어요. 지금 딱지 떼나 나중에 떼나 마찬가지잖아.            면허증 내요.
  영호 그럼 나중에 떼요.
  교통 (영호의 행색을 훑어보며 뭔가 수상하다는 것을 느낀다.) 당신 이거                   도난차 아냐? 신분증 내봐요.
 
                 (영호, 하는 수 없다는 듯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그러나 신분증을 꺼                  내는 척하던 손이 갑자기 순경을 친다. 쓰러지는 순경. 영호, 그대로                   달아난다. 순경 그 뒤를 쫓는다.)

            (뛰고 있는 영호. 뒤 쪽에 따라오는 순경 보인다. 그러나 곧 단념하고            달아나는 영호를 보고 있다.)
 
23. 골목 (외부. 밤)-----------------------------------------------------

                 (차들이 주차해 있는 비탈진 골목. 멀리 전신주의 불빛이 비칠 뿐, 어                  둡다.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멀리서 걸어 내려오며 차들을 살펴본다.             LONG SHOT.
                 어느 차 옆에 붙어서서 차문을 따려고 한다. 갑자기 요란한 경고음이            들린다. 자동경고장치가 된 차이다. 황급히 어둠 속으로 도망치는 그                  림자. 차가 세워진 담 안쪽 집에 불이 켜진다.
                 어느새 카메라 앞으로 다가온 그림자. 김영호다. 벽에 등을 기대고 가                  쁜 숨을 삼키다가 돌아본다. 경고음은 계속 들린다.)

24. 아파트 안 (내부. 밤)-------------------------------------------------

                 (불이 꺼져 있는 어느 집 아파트의 현관문.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사이. 다시 초인종이 울린다. 개가 콩콩 짖는 소리도 들린다. 개는 보                  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이윽고 불이 켜진다.)

  홍자 (오프 사운드)누구세요?
  영호 나야. (물론 이 목소리는 제대로 안들려도 상관없다.)

                 (홍자가 프레임 인 해서 콩알유리로 내다본다. B.S. 문을 열지만, 문                  고리가 걸려있어서 겨우 밖을 볼 수 있을 정도만 열린다. 좁은 틈으                  로 바깥에 서 있는 영호의 얼굴이 보인다.)

  홍자 왜 왔어요?

                 (여자의 목소리는 냉담하다. 영호, 대답을 못하고 있다. 계속 개 짖는            소리 들린다.)

  영호 세민이는?
  홍자 자요.
  영호 (더 할 말이 없다.)
  홍자 왜 왔냐니깐요. 올 일이 없는데.
  영호 뽀삐…… 뽀삐가 보고 싶어 왔어.

                 (영호 허리를 굽힌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카메라 틸다운해서 그의                   발치에 있는 개를 보여준다. 개는 꼬리를 흔들며 그를 미친 듯이 반                  긴다. 문은 쇠고리의 길이만큼만 열려 있다. 영호는 그 틈으로 손을                   집어넣어 개를 만지고, 개는 그 손을 혀로 핥는다.)

  홍자 (O.S.) 이제 됐죠?

                 (그러나 영호와 뽀삐의 상면은 계속된다.)

  홍자 이제 가세요. 늦었는데. (그녀의 발이 뽀삐를 안으로 밀어낸다.)
                 뽀삐, 들어가!

                 (뽀삐는 밀려가면서 영호를 보며 킹킹거린다. 그런 개를 바라보는 영                  호. 개는 프레임 아웃되고 아쉬운 듯 콩콩 짖는 소리만 들린다. 영호,            쪼그리고 앉은 채로 고개를 쳐들어 홍자를 본다. 천천히 문이 닫히자,            손으로 막는다.)

  홍자 왜요? 왜요?

                 (아무 말도 못하고 쳐다보고만 있는 영호의 얼굴. 그 얼굴을 막으며                   이윽고 문이 닫힌다.)

25. 비닐 하우스 밖(외부. 밤)---------------------------------------------

                 (비가 뿌리고 있는 차의 앞 유리창. 차 안에 앉아 있는 신광남의 얼굴           이 불투명하게 보인다. 누군가를 발견한 듯 표정이 긴장한다. 와이퍼                  를 작동시킨다. 와이퍼가 빗물을 씻어내리자, 그의 얼굴이 약간 분명                  해진다.)

                 (신광남의 시점. 와이퍼가 씻어내리는 앞 유리창으로 보이는 비닐 하                  우스 옆 길. 보안등이 희미하게 불을 밝히는 어둠 속에 빗발이 떨어                  지고 있고, 황량한 벌판에 비닐 하우스 몇 채만 서 있는 을씨년스런                   풍경이 보인다. 비를 맞으며 김영호가 걸어오고 있다.
                 어느 비닐 하우스 앞으로 걸어간다. 물 구덩이을 디뎠는지, 혼자 욕설                  을 퍼붓는 소리가 들린다.)

26. 비닐 하우스 안 (내부. 밤)--------------------------------------------

                 (비닐 하우스의 문 안쪽. 희뿌연 비닐 바깥에 영호가 문 앞으로 다가                  오는 실루엣이 보인다. 계속 뭔가 욕설을 중얼거리고 있다.
                 이 장면은 일종의 그림자극처럼 보인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려고 하는데, 어둡고 비가 와서 잘                   찾을 수 없는 모양이다. 이것저것 열쇠를 바꿔가며 자물쇠를 열려고                   하는데, 꽤 힘이 든다. 입으로는 계속 뭔가 욕설을 중얼거리고 있다.
                 그의 뒤에서 다른 실루엣이 나타난다. 그가 영호의 뒤로 다가올 때까                  지 영호는 모르고 있다.)

27. 비닐 하우스 앞 (외부. 밤)--------------------------------------------
                
                 (허리를 구부리고 자물쇠를 열려는 영호의 등 뒤로 다가서는 우산 쓴            신광남.)

  광남 김영호씨.

                 (놀라 돌아보는 영호.)

  광남 김영호씨 맞죠?
  영호 당신 누구요?
  광남 내가 해볼까요?

            (광남, 영호에게 우산을 건네고 대신 열쇠뭉치를 받아들고 문 앞으로            다가선다.)

  광남 무슨 열쇠를 이렇게 많이 갖고 계세요?
 
                 (영호, 우산을 쓴채 자물쇠를 열고 있는 광남을 내려다본다. 의외로                   쉽게 문이 열린다.)

28. 비닐 하우스 안 (내부. 밤)--------------------------------------------

                 (비닐 하우스의 문이 열리며 바깥의 두 사람이 보인다. 영호는 광남에           게 우산을 돌려주고 열쇠를 받는다. 그리고 비닐 하우스 안으로 들어                  온다. 불을 켜면, 15평 정도의 좁고 구지레한 비닐 하우스 내부가 드                  러난다. 광남은 여전히 바깥에 서 있다.)

                 (때묻은 수건으로 비에 젖은 머리를 대충 닦는다. 비닐 하우스 내부는            몹시 어수선하다. 한쪽에는 분재 화분이나 물건들이 쌓여있고, 한쪽에            부랑자 숙소 같은 영호의 살림살이가 있다. 영호는 어질러진 물건들                  을 발로 차며 치운다. 라면 자국이 말라붙은 냄비가 소리내어 구른다.            그 동안에도 광남은 문 바깥에서 우산을 받고 서 있다.)
 
  영호 들어오쇼!

                 (이윽고 광남이 하우스 안으로 들어선다. 우리는 처음으로 그의 모습                  을 자세히 볼 수 있다. 신광남. 40세 정도. 덩치가 꽤 크고 얼핏 보기                  에 건달세계에서 뼈가 굵은 사람처럼 강단이 있어 보인다. 넓은 어깨                  가 빗물로 젖어있다.)

  영호 거기 좀 앉으시오. 누추하지만.

                 (고물상에 주워 온 것 같은 의자에 앉는 광남. 영호는 일부러 그러듯            조금 떨어진 곳에 앉는다.)

   광남 김영호씨 찾느라고 애 많이 먹었어요.

                 (하는데 광남의 머리에 빗물이 뚝뚝 떨어진다. 비닐 하우스의 천정에                  서 비가 새는 것이다. 두 사람 천장을 올려다본다.)

  영호 (농담처럼) 어, 이번에는 거기가 새네. 어젯밤에는 자는데 마빡에 비                  가 떨어지더니.

                 (광남이 의자를 약간 옮겨 앉는다. 갑자기 영호가 권총을 꺼내 든다.
                 광남이 일어서려 하자 버럭 소리를 지른다.)
 
  영호 앉아 있어! 씹새끼야!
  광남 어, 왜 이래요?
  영호 이거 장난감 아니야. 앉어.

                 (다시 주저앉는 광남. 영호, 잠깐 떨어지는 빗물을 쳐다본다.)

  영호 나 사는 게 한심하지? 응? 왜 이러고 사나 싶지? 당신 누가 보내서                   왔는지 모르지만, 이왕 왔으니까 우리 이야기나 좀 합시다. 비도 오는                  데. 분위기 좋잖아. 술 한잔 하시까?
  광남 아니, 됐어요.
  영호 한잔 할래도 마실 술이 없네. (킬킬대며 웃는다)
                 내 말 들어봐. 나, 이 총으로…… 딱 한 놈만 죽일라 그랬어. 내 혼자            죽기엔 너무, 너무 억울하니까 딱 한놈만 내 저승길에 같이 동행하자.
            내 인생을 이렇게 망쳐놓은 놈들 중에 딱 한놈. 그런데 어떤 놈을 죽                  일까? 참 고민 되더라고.
                 응? 딱 한놈을 고를려니까 그게 어려운 거야. 피 같은 내 돈 다 날려                  버리고 깡통차게 한 증권회사 직원놈을 죽일까? 달러빚 내주고 고리                   뜯어낸 사채업자 그 흡혈귀 같은 그놈을 죽일까? 아니면, 동업한다                   해놓고 사기치고 토깐 친구놈을 죽일까? 이혼한 마누라하고 애새끼하                  고 같이 죽어버리까?
                 (감정이 격해져서 잠시 말을 끊는다. 빗물은 계속 떨어진다.)
                 그런데 죽일 놈이 없더라고. 내 인생을 요 모양 요꼴로 만든 죽일 놈                  들이 너무 많아서 한놈을 못 고르겠더라고. 그래서……
                 (권총을 장전한다.)
                 당신, 어느 놈이 보내서 왔는지 모르지만 오늘 날 잘못 택했어.
                 (총구를 자신의 머리로 가져가 관자놀이에 댄다.)
                 어떻게 할래? 구경하고 갈래? 그냥 갈래?

                 (광남, 말없이 그냥 보고만 있다. 마치 영호가 방아쇠를 당기길 기다                  리듯이.
                 두 사람 그 기묘한 자세로 꼼짝않고 앉아 서로 말없이 쏘아보고 있                  다.
                 사이.)

  광남 김영호씨, 윤순임이 아시지요?
  영호 누구?
  광남 윤, 순, 임. 나 윤순임이 보내서 왔어요.

                 (영호, 잠시 대답이 없다. 그 이름 석자가 그에게 혼란을 준 것 같다.)

  영호 윤순임이가 누군데?
  광남 윤순임이…… 기억 못해요? 옛날에 두 사람이…… 서로 좋아했다던                  데.
  영호 아,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아직 의혹을 버릴 수 없다.)                   그, 윤순임…… 그런데 그 여자가 왜 날 찾아? 당신 누구요?
  광남 난 윤순임이 남편 되는 사람입니다.
                 (말하기 거북한 듯 약간 헛기침을 한다.)
                 그 여자가 당신 만나고 싶다고 그래요.

                 (영호, 혼란과 의혹에 사로잡힌 채 광남을 쳐다본다. 사이.)

  영호 당신 지금 장난하는 거지? 그 여자가 이제 와서 왜 날 찾아?
  광남 마누라 지금 병원에 있어요. 살 날이 얼마 안남았어요. 그런데 죽기                   전에 소원이니 김영호씨 좀 찾아달라고 하더라고요. 죽기 전에 딱 한            번만 만나고 싶다고……
  
                 (영호, 광남을 멀거니 보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쿨룩쿨룩 웃기 시작           한다.)

  광남 어떻게 하실래요? 만날 거예요? 아니면……
      
                 (총을 들고 있던 영호의 손이 천천히 내려진다. 천장에서 빗물이 점점            많이 떨어지고 있다.)

29. 도로변 (외부, 아침) -------------------------------------------------

                 (다음 날 아침. 비는 그쳤지만 땅은 젖어 있다.
                 김영호의 비닐 하우스가 있는 난지도 상암동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도           로. 차량 운행이 뜸하다. 광남의 차가 달려오다가 도로변에 멈춰선다.            김영호와 광남이 앞자리에 타고 있고, 뒷자리에는 예닐곱 쯤 되어 보                  이는 광남의 딸아이가 타고 있다.)

             (차를 세우고 영호를 돌아본다.)

  광남 내 부탁 좀 들어주실래요?
  영호 뭔데요?

                 (광남, 차의 뒷자리에서 비닐 주머니에 든 옷 보따리를 꺼내 영호에게            내민다.)

  영호 이게 뭐요?
  광남 아침에 오면서 옷을 샀는데, 김선생한테 맞을지 모르겠네요.
  영호 옷을 왜요? 나보고 이 옷으로 갈아 입으란 얘기요?
  광남 지금 김선생 모양이 좀…… 보기 그러니까, 깔끔하게 갈아입으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영호 (어이가 없다) 하, 나 참. 사람 여러 가지로 욕 보이네. 이봐요, 나, 윤                  순임씨, 당신 부인 별로 만나고 싶은 생각 없어요. 나 그 사람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옛날에 잠깐 좋아지낸 적은 있었지만, 뭐 젊을 때 흔                  히 있던 감정이고, 그리고 헤어진지 십몇년이 지났어요. 근데…… 이                  제 와서 갑자기 만나겠다는데, 솔직히 나 잘 이해도 안가지만, 어쨌든            죽어가는 사람이 원한다고 하니까, 가는 거요. 그런데 왜 내가 옷을                   갈아 입어? 내 모양이 보기 싫으면 안 만나면 될 거 아냐?
  광남 (감정을 억제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부탁한다고 했잖아요.
            
                 (영호, 광남의 태도에 말이 막힌다.)

  광남 나, 이 짓 좋아서 하는 일 아닙니다. 죽어가는 마누라가 죽기 전에 첫                  사랑 애인 만나게 해달라는데 좋아할 놈이 세상에 어디가 있어요?
  영호 ……
  광남 나 어젯밤에 김선생이 총 들고 자살한다 난리칠 때 그냥 가만 두고                   볼라 그랬어요. 내 눈 앞에서 죽는 거 보고 싶습디다. 하도 한심하고                   미워서……
  영호 ……
  광남 그 여자…… 참 착한 여자요. 나 만나서 고생 많이 했지요. 나 지금까                  지 살면서 애엄마한테 옷 한 벌 사준 적 없고, 외식 한 번 못해봤어                  요. 병 난 걸 알고, 하도 불쌍해서 결혼하고 처음으로 애 데리고 드림                  랜드 갔다가 고기집에 들어갔는데…… 맛있다, 맛있다 하면서…… 나                  중에 그걸 다 토해버리더라구요. 그렇게 살았어요. 그 여자……

                 (착잡하게 듣고 있는 영호의 얼굴.  CLOSE UP.
                 고개를 돌려보면, 광남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소리없이 눈물을 철                  철 흘리고 있다. 뒷자리에 있던 어린 딸 아이가 아빠의 어깨에 매달                  려 말없이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고 있다.)
      
  광남 나 마누라가 왜 이제와서 까마득한 옛날 첫사랑 애인을 만날라 하는                  지 몰라요. 하지만 그 여잔 늘 김형 생각을 지금까지 가슴에 품고 있                  었던 모양이라요. 그러니 만나게 해줘야지요. 그라고, 이왕 만날라면                   좀 좋은 모습으로, 옛날에 사랑하던 남자가 마음 속에 있는 그대로,                   나타나면 덜 허무할 거 아니겄소? 그냥…… 나혼자 그런 생각을 한                   거지요.

                 (말없이 보고 있는 영호.)

30. 도로변 근처 (외부. 아침) --------------------------------------------

                 (도로 아래의 둑 밑,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을 만한 곳에서 옷을 갈                  아입고 있는 영호. 옷을 하나씩 벗고 결국 속옷까지 벗는다. 황량한                   벌판에서 벌거벗은 그의 알몸이 왠지 슬퍼 보인다.)

31. 차 안 (외부. 아침) --------------------------------------------------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고 있는 광남.
                 이윽고 신사복에 넥타이까지 맨 영호가 다가온다. 옷은 약간 몸에 맞                  지 않은 듯 어딘가 어색해 보인다.)

  광남 (차에 타려는 영호에게 면도기를 내밀며) 면도도 해요.
      
32. 시장 (외부, 낮) ----------------------------------------------------

             (서울 변두리의 재래식 시장 입구. 달려오던 광남의 차가 길 가에 멈                  춘다. 차에서 내리는 영호.)

  영호 (운전석의 광남에게) 잠깐이면 돼요. 도망 갈 거 아니니까, 걱정마요.                  못 미더우면 같이 가실래요?
  광남 됐어요.

                 (시장 안으로 들어가는 영호.)

33. 시장 (내부, 낮)-----------------------------------------------------
      
                 (재래식 시장의 제과점. 유리문으로 제과점 주인에게 뭔가 묻고 있는            영호가 보인다. 이윽고 영호가 문을 열고 나온다. 시장 골목 안으로                   걸어간다. 카메라, 그를 따라  PAN하면 재래식 시장 풍경이 보인다.                   시장골목을 걸어가며 상인들에게 뭔가 묻고 있는 영호.)

34. 시장 (외부, 낮) ----------------------------------------------------

                 (차에 탄 채 기다리고 있는 광남. 영호가 차에 올라탄다. 커피병 만한            작은 유리항아리를 들고 있는데, 그 안에 흰 사탕 같은 것이 들어 있                  다.)

  광남 (영호가 들고 있는 유리 항아리를 보고) 그게 뭐요?
  영호 환자한테 빈 손으로 갈 순 없잖아요.
                 (유리 항아리를 열고 사탕 하나를 꺼내어 뒷자리의 여자아이에게 준                  다.) 너 이거 하나 먹을래?

                 (빤히 보고만 있는 아이.)

  영호 먹어봐. 사탕이야. 박하사탕. 아주 맛있어.

                 (아이가 손을 내밀어 사탕을 받는다.)

                 (출발하는 차.)
      
35. 병원 복도 (내부, 낮) ------------------------------------------------

                 (종합병원의 긴 복도.  LONG SHOT.
                 벽에 붙은 긴 의자에 앉아 있는 영호. 맞은 편 의자에는 아이가 앉아            있다. 아이는 손에 든 장난감으로 무심하게 장난을 하면서 계속 영호                  를 빤히 보고 있다. 그 동안 환자들, 간호원들이 지나가기도 한다.
                 광남이 화면 앞쪽에서 프래임 인 해서 영호에게 다가간다.)

  광남 자, 들어갑시다.

                 (영호, 일어선다. 아이도 따라 일어선다.)

  광남 (아이에게) 넌 여기 있어. 아빠 금방 나올게.

                 (두 사람, 화면 앞쪽으로 프래임 아웃. 아이만 이쪽을 보고 있다.)

36. 병실 (내부, 낮) ----------------------------------------------------

                 (병실 문이 열리고, 광남과 영호가 들어선다. 영호는 가능한 자연스럽                  고 밝은 표정을 지으려 애를 쓴다. 그러나 병상에 다가가는 동안, 점                  차 얼굴이 굳어진다.)

                 (영호의 뒤에서 그의 시점으로 따라가는 카메라. 병상에 누운 순임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진다. 한눈에도 상태가 몹시 나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야위고 창백한 얼굴, 불규칙한 호흡을 내쉬는 앙상한 가슴, 팔                  에는 주사바늘이 꽂혀 링겔 병과 연결이 되어 있다. 그녀는 눈을 감                  고 있다.)

  광남 여보, 김영호씨 오셨어.

                 (그러나 순임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사이. 그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영호 윤순임씨…… 오랜 만이네요.
  순임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미안해요. 이렇게 일                  부러 오시게 해서.
  영호 (아직 몹시 어색하다) 아, 아닙니다.
  순임 왠지 영호씨가 참 보고 싶었어요. 이상한 여자죠? 왜 영호씨가 그렇                  게 보고 싶었을까요?

                 (그녀가 비로소 눈을 뜬다. 눈물 때문에 눈을 깜박이며, 아주 두려운                   듯이 영호를 쳐다본다.)

                 (순임의 시점. 병상 곁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영호의 얼굴.)

  순임 (미소 짓고 있다.) 다행이예요. 영호씨 모습, 옛날하고 별로 변하지 않                  았네요.
  광남 나 나가 있으께. 두 분이서 얘기해.
  순임 소희아빠, 나가지 마세요. 그냥 있어요.

                 (두 사람, 잠시 어색하게 서 있다.
                 영호, 주머니에서 시장에서 산 작은 유리 항아리를 꺼낸다.)

  영호 (순임에게 내밀며) 이거 기억나요?
  순임 이게 뭐죠?
  영호 박하사탕.

                 (영호가 유리병을 열어 보여준다.)

  영호 옛날에 내 군대 있을 때 순임씨가 이거 보내줬잖아요. 내게 편지 한                   통 보낼 때마다 편지봉투 안에 이거 한 알씩 넣어서. 그걸 내가 다                   모아 두고 있었어요, 지금까지.

                 (순임, 말없이 그 박하사탕이 든 병을 본다. 영호가 유리병 안에서 하                  얗고 마름모꼴로 된 옛날식 박하사탕 하나를 꺼낸다. 순임의 여윈 손                  가락이 그것을 받아든다.)

  영호 아직 옛날 모양 그대로 있어요.
  순임 (광남을 쳐다보며 농담처럼) 난 사탕은 안 먹는데. 이빨이 나빠서.

                 (그녀는 그 사탕을 자신의 코 끝에 대고 냄새를 맡는다. 소리없이 눈                  물이 흘러내린다. 광남은 말없이 그 모습을 보고 있다.)

  영호 사실은 이것 때문에 군대 있을 때 혼났어요. 편지에 사탕 같은 거                   넣어보낸다고.

                 (순임은 눈물을 흘리는 채로 영호를 쳐다보며 웃는다. 그리고 들고                   있던 사탕을 내민다.)

   순임 저 대신 잡수세요. 박하사탕 좋아하셨잖아요.

                 (영호, 사탕을 입에 넣는다. 순임, 광남을 쳐다보며)

  순임 당신도……

                 (영호, 유리병 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광남에게 건넨다. 광남이 그                  것을 받아 입안에 넣는다. 두 사람 모두 사탕을 입 안에 넣고 잠시                   말이 없다.)

                 (꽤 긴 침묵.)

  순임 이제 됐어요, 영호씨. 이제 가셔도 돼요. 전 딱 한 번만 만났으면 좋                  겠다 싶었어요. 그저…… 어떤 모습으로 계시는지 딱 한 번만 보고                   싶었어요. 이제 만났으니 됐어요.

                 (순임, 눈을 감는다.)

                 (영호, 말없이 일어나 박하사탕이 든 유리항아리를 순임의 머리맡에                   놓아둔다.)

                 (눈을 감고 있는 순임의 얼굴, CLOSE UP. 이윽고 눈을 뜬다. 그녀의            시선이 머리맡으로 옮겨간다. 카메라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조용히                   PAN한다. 하얀 박하사탕을 담은 유리항아리까지. 극단적인 CLOSE                   UP.)
            
37. 병원 복도 (내부, 오후) ----------------------------------------------

                 (씬33과 같은 복도. 영호, 긴의자에 혼자 앉아 있다.
                 허리를 구부린 채 정물처럼 꼼짝도 않고 앉아 있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간다.)

38. 엘리베이터 앞(내부, 오후) -------------------------------------------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영호가 프래임 된다. 엘리베이                  터가 열리고 막 영호가 탈려는데,)

  광남 김영호씨!

                 (영호, 돌아본다.)

  광남 김형꼐 전해드릴 게 있는데, 아까 잊어버렸네요.
             (영호에게 뭔가 내민다. 검은 가죽 케이스에 든 카메라다.)
              애엄마가 이거 꼭 좀 전해달라고 했어요. 자기 게 아니고 김영호씨                   거라고. 자기가 그냥 맡아두고 있던 거라고. 

                 (영호, 엉겁결에 카메라를 받아든채 엘리베이터를 올라탄다. 엘리베이                  터의 문이 닫힌다.)

39. 병원 밖 (외부, 오후) ------------------------------------------------

                 (종합병원 구내. 병원 건물 쪽에서 영호가 걸어오고 있다. 그의 어깨                  에 어울리지 않게 카메라가 매달려 있다. 문득 걸음을 멈추는 영호.                   병원 건물을 한참 쳐다보고 있다.)

40. 카메라점 (내부, 오후) -----------------------------------------------
                
                 (상가골목에 있는 카메라점. 주인이 카메라를 살펴보고 있는 동안 영                  호가 기다리며 서 있다. 가게 유리문으로는 골목 맞은 편의 레코드                   가게가 보이고, 그곳 스피커의 라디오 소리가 들려온다. 양희경이 진                  행하는 가요 프로그램이다.)

  주인 이거 너무 오래 돼서 값이 얼마 안 나가겠어요. 나온지 20년이 지나                  서 찾지도 않는 물건이고. 요새 누가 수동카메라 쓰나요?
  영호 그러니까, 얼마 줄 수 있어요?
  주인 5만원 쳐드릴께요.
  영호 그러세요.

                 (주인이 돈을 준비하는 동안 영호는 소음처럼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                  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양희경의 <트롯트 가요앨범>에서 양희경과                   청취자가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양희경 그럼 '30초 PR'을 하실 첫 번째 분을 모시겠습니다. 여보세요?
청취자 (40세 정도의 남자 목소리.) 여보세요.
양희경 네, 어디 사는 누구세요?
청취자 저, 독산동에 사는 김기봉인데요.
양희경 네, 어떤 것을  PR하시고 싶으세요?
청취자 '가리봉 봉우회' 라는 모임이 있거든요. 제가 회장이거든요.
양희경 예, '가리봉 봉우회' 회장님. 이름이 재밌네요.
청취자 옛날 가리봉동 벌집에서 살면서 공장에 다니던 친구들이 만든 모임이           거든요.
양희경 (웃으며) 예, 벌집에서 살았다고, 벌 봉(蜂)자, 봉우회군요.
청취자 예, '가리봉 봉우회' 회원들이 이번에 20년 만에 다시 모여서 소풍을                   가기로 했거든요. 그래서 그걸 옛날 회원들에게 널리 알릴려고 하거                  든요.
양희경 그럼 30초 동안, (청취자의 말투를 흉내내며) 시간을 드리……겠거든                  요. 준비되셨죠?

                 (라디오 소리에 정신이 팔린 영호에게 주인이 돈을 내밀고 있다.)

  주인 여깅어요.
                
                 (그러나 영호, 듣지 못한다.)

  주인 (크게) 여기요!

                 (영호, 돈을 받고 가게를 나간다. 그 동안에도 라디오 소리는 계속 들                  린다.)

41. 상가 골목 (외부, 오후) ----------------------------------------------

                 (비좁은 상가 골목.  LONG SHOT.
                 카메라점에서 나온 영호가 걸음을 멈춘 채 레코드점의 라디오 소리를            듣고 있다.)
 
청취자 옛날 가리봉동에서 함께 지냈던 '가리봉 봉우회' 친구들이 20년 만에                   다시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 동안 뿔뿔이 흩어졌던 그리운 친구들, 오                  랜 만에 다시 모여서 20년 전 첫 야유회를 갔던 그 장소, 귀여리 철                  교 밑으로 옛 추억을 찾아갑니다. 내일 오후 두 시, 이 방송을 듣고                   있는 '가리봉 봉우회' 친구들 꼭 오시기 바랍니다……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땡, 30초가 지났다는 종소리가 들린다.)

양희경 네, 수고하셨습니다. '가리봉 봉우회' 회장님께서 30초 PR을 해주셨습                  니다.

                 (걸어가는 영호. 골목 안을 오가는 인파 사이로 모습이 감춰진다. 여                  전히 라디오 소리는 계속 된다.)

양희경 정말, 오랜 만에 비가 그친 오늘 같은 오후는 그 옛날의 우정, 그 옛                  날의 첫사랑이 그리워지는, 그런 날입니다. 노래 듣겠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지극히 일상적인 상가 골목의 풍경. 그 위로 윤                  형주의 '어제 내린 비'가 흘러나온다.
                 천천히 F.O.)

42. 열차 (외부. 저녁)---------------------------------------------------

                 (수초 동안의 암전 상태에서 짧은 F.I.과 함께,
                 달리는 열차의 시점에서 보는 풍경이 나타난다. 기차의 움직임은 느                  리고 평화스럽다. 마치 과거로, 과거로 달려가듯.
                 차들과 사람들이 멈춰 서 있는, 차단기가 내려진 건널목을 지나간다.                   사람들과 차들의 움직임은 거꾸로 보인다.
                 땡,땡,땡,땡……. 차단기의 종소리가 먼 추억처럼 들려온다.
                 오륙초 정도 계속되다가 다시 암전.)

43. 작은 타이틀 (무지) -------------------------------------------------
                
                 (어둠 속에서
                 '삶은 아름답다'라는 자막이 떴다가 사라진다. 이어서,
                 '1993년 여름'이라는 자막이 떠올랐다가 바람에 풍화되는 것처럼 점                  차 사라진다.
                          
                
44. 엘리베이터 (내외부. 아침)--------------------------------------------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 영호가 올라타고 버튼을 누른다.
                 엘리베이터의 내부에는 사면에 합판이 붙여져 있고, 그 위에 어지러                  울 정도로 온갖 전화번호, 스티커 등이 붙어 있다. 샷슈, 커텐, 쌀가                  게, 이삿짐센타, 복덕방, 중국집 등등. 그런 것들이 이제 막 입주를 시                작한 새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임을 알게 한다.
                 영호는 마치 수많은 아우성처럼 어지럽게 붙은 전화번호들을 망연히            올려다보고 있다. 그의 나이는 지금 서른 다섯이다. 땡,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듯하다. 걸어나오는 영호를 따라 카메라 트                  랙 백한다. 새로 입주한 아파트의 일층 출구로 나오는 영호. 주차장                   쪽으로 걸어간다.)

45. 아파트 주차장 (외부. 아침)-------------------------------------------

                 (아파트 앞 주차장에서 차에 타려는 영호, 문득 고개를 들어 아파트                   건물을 쳐다본다.)

                 (칠팔 층쯤 되는 자기집 베란다에 매달려 다섯 살의 세민이가 내려다                  보고 있다. 아빠가 올려다보자, 손을 흔든다. 영호도 손을 흔든다.
                 베란다 안 거실 유리문에 아내 홍자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녀는 잠시            아래를 보는 듯하더니, 곧 안으로 사라진다. 한참 동안 올려다보던 영                  호, 이윽고 차에 올라탄다.)

46. 차 안 (외부. 아침)---------------------------------------------------

                 (차를 운전하고 있는 영호의 측면 B.S. 차걸이. 운전대를 잡고서도
            카폰으로 전화를 하고 있다.
                 그가 통화를 하고 있는 동안, 카메라 고정된 채로 빠르게 흐르는 뒷                  쪽의 배경만 점프컷으로 바뀌면서 시간 경과를 보여준다. 점프컷 할                   때마다 통화의 상대도 바뀐다.)

  영호 미스 리? 일찍 나왔네. 전화 온 거 없어? 누구? 그래서? 그 새낀 왜                   맨날 그 소리만 해? 야, 또 전화 오면 당장 들어오라고 해.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란 말이야. 뭐? 왜 그래? 뭐? 그럼 내가 너한테 야 소리                  도 못하냐?
                 (점프 컷)
             그럽시다. 한 잔 합시다. 아, 내가 사야지. 무슨 소리야, 내가 사야지.                   아냐, 내가 산다니까. 그런 소리 하실라면 나 안만날랍니다. 응? 하하                  하……
                 (점프 컷)
                 예, 오늘도 운전교습 받으러 나간다 했어요. 어디로 가는지는 난 모르                  지요. 예, 눈치 안 채이게 뒤를 잘 밟아 보시고 나한테 전화 주세요.

                 (마지막 통화 할 때는 표정이 매우 어둡다.)

47. 가구점 안 (내부. 낮)-------------------------------------------------

                 (김영호가 동업으로 운영하는 가구점 내부.
                 각종 가구들이 진열되어 있고, 한쪽에 유리 칸막이로 된 작은 사무실                  이 있다.)

                 (사무실 소파에 영호와 임사장이 앉아 있다. 미스 리가 커피를 가져                   와 두 사람 앞에 놓는다. 영호는 신문에 코를 박고 들여다보며 계속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임사장은 TV 뉴스를 보고 있다. TV에서는                   대형사고의 속보를 전하고 있다.)

영호 얄밉게 떠난 님아, 얄밉게 떠난 님아……. 내 사랑 내 청춘을 짓밟아 놓           고…….
임사장 김사장 뭐가 그리 좋아? 또 올랐어?
  영호 (흥얼거리는 노래가락에 맞춰) 삼성전자가 또 300원 올랐어요.
임사장 (약 올라서) 300원이면 얼마야? 좋겠다, 누구는 주식으로 돈 벌고,                   장사해서 또 벌고……
  영호 (계속 노래한다) 배신자여, 배신자아여어……
임사장 아, 그만 해! 밥이나 사!
                 (자리에서 일어난다.)
  영호 (따라 일어나며) 사아랑에에 배신자여……

48. 가구점 밖 (외부. 낮) ------------------------------------------------

                 (차 앞에 서 있는 두 사람.)

임사장 어디로 갈까?
  영호 글쎄? 어디로 갈까?
임사장 홍릉은 차 막히지?
  영호 막히지.
미스리 (O.S) 사장님!
임사장 (돌아보며) 누구, 나?

                 (미스 리가 내다보고 있다.)

미스리 아니, 김사장님요. 전화 왔어요.
  영호 어디래?
미스리 심부름센타라는 데요.
  영호 (임사장에게) 오늘 점심은 안되겠는데요. 다음에 살께요.
                 (급히 안으로 들어간다.)
임사장 뭐? 그런 게 어딨어? 어이!

                 (그러나 영호는 이미 안으로 들어갔다. 미스 리, 임사장을 보고 웃으                  며 혀를 쏙 내민다.)

49. 공터 (외부. 오후)---------------------------------------------------
                                                                         
                 (어느 다리 밑 공터.
                 교습 중인 운전연수 차량 한 대.)

                 (홍자, 운전대를 잡고 서툴게 차를 운전하고 있다. 운전석 옆자리에는            운전학원 강사 같이 보이는 젊은 사내가 앉아 있다. 그는 아주 친절                  하게 이것저것 지시를 하고 있다.)

                 (둑 위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는 영호. 담배를 피워문다.)

50. 러브호텔 룸 (내부. 오후)---------------------------------------------

                 (서울 교외에 있는 러브 호텔의 룸. 침대에 강사가 누워서 담배를 피                  우고 있다. 낮인데도 커텐이 처져 있어서 약간 침침하다. 이 장면은                   처음부터 끝까지, '몰래 카메라'와 같은 앵글로 CAMERA 고정되어                   있다.
                 초인종 소리 들린다.
                 강사가 팬티를 주워 입고 나간다. 욕실에서 여자의 목소리 들린다.)

  소리 누구예요?
  강사 예, 내가 담배 시켰어요.

                 (문 여는 소리. 그러나 강사 금방 쫓겨 방으로 들어온다. 뒤따라 영호                  가 들어온다.)

  강사 어? 왜 이래요?
  영호 어디 갔어?

                 (영호, 방 안을 둘러보곤 욕실 문을 연다. 여자의 비명소리 들린다. 영           호의 고함소리와 여자의 비명소리 이어지다가, 홍자가 샤워를 하던                   벗은 몸 그대로 방안으로 도망쳐 나온다. 영호가 따라나오자, 급하게                   옷을 주워 입은 강사가 도망치려한다.)

  영호 (강사를 걷어차며) 어디 가, 새꺄?

                 (강사,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영호 계속 홍자를 붙잡으려 하고 홍자                  는 다시 욕실로 쫓겨들어간다. 욕실에서 비명소리 계속 들린다.)

51. 러브호텔 밖 (외부. 저녁 무렵)----------------------------------------   
                 (러브호텔 앞. 영호와 홍자, 그리고 강사가 걸어나온다.
                 홍자가 앞장서 걸어가고, 영호와 강사는 걸음을 멈추고 뭔가 이야기                  하고 있다. 약간 롱샷. 영호가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강사를 때린다.                   강사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다. 다시 뭔가 이야기하며 걷기 시작                  한다. 그러다가 다시 영호가 강사를 때린다. 발로 차기도 한다. 홍자,                   그 모습을 보고만 있다. 이윽고 강사가 자기 차로 걸어가서 차에 오                  른다.)                                   

                 (홍자에게 천천히 걸어오는 영호. 그러나 홍자를 쳐다보는 그의 표정                  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표정이다.)

  영호 집으로 들어갈 거야?
  홍자 예. (사이.) 당신은 집에 안 들어가요?
  영호 난 조금 더 있다 갈게. 뭐 타고 갈 거야?
  홍자 저쪽…… 길에 나가서 택시 잡지요, 뭐.
  영호 그래? (사이.) 가, 그럼.
  홍자 ……
  영호 뭐 해? 가.
  홍자 일찍 들어와요?
  영호 늦을 거야.

                 (조금 머뭇거리다가 결국 길 쪽으로 걸어가는 홍자. 영호, 그 모습을                   보고 있다.)

52. 러브호텔 근처 (외부. 저녁)-------------------------------------------

                 (러브호텔 근처의 공터. 영호의 차가 세워져 있고, 미스 리가 차 안에            타고 있다. 영호가 걸어와서 차에 탄다.) 

                 (미스 리는 조금 화가 나 있다.)

미스리 웬일이야? 사람을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고.
  영호 그 동안 밥이나 사먹고 있으라 했잖아.
미스리 이런 데서 혼자서 무슨 맛으로 밥을 사먹어요?
  영호 그래서? 안 먹었어?
미스리 먹었어요.

                 (시동 거는 소리.)

53. 차 안 (내부. 밤)----------------------------------------------------

                 (카 섹스 중인 남자와 여자. 무더운 여름밤 한적한 차 안.
                 차창은 약간 내려져 있고 바깥은 캄캄한 어둠이다. 남자 위에 올라앉                  은 여자는 아랫도리를 벗은 채 엉덩이를 허옇게 드러내고 있다. 장소                  가 협소한 만큼 그들의 행위는 몹시 불편할 수밖에 없다. 여자는 암                  코양이 같은 신음을 쏟아내며 숨넘어갈 듯 "사장님!" 또는 "오빠!"를                   부른다. 기분이 격해질수록 "오빠!" 쪽이다. 그러면서 가끔 여자는 손                  바닥으로 자기 엉덩이를 찰싹 때린다. 신음소리와 함께 엉덩이의
            상하운동을 계속하면서 손바닥으로 가끔 자기 볼기짝을 찰싹 소리나                  게 때리는 여자의 기묘한 동작은 몹시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54. 식당 안 (내부. 저녁 무렵) -------------------------------------------

                 (양수리 근처 야외에 있는 고기집.
                 정자 모양으로 된 식당 안에 가족 단위의 손님들이 보인다.
                 식당 한쪽에서 고기를 구워 먹고 있는 영호와 미스 리.)

미스리 고기 맛이 괜찮다!
  영호 너 밥 먹어놓고 또 먹어?
미스리 먹어야죠. (은밀하게) 땀 뺐으니까.

                 (미스 리는 아까부터 계속 앉은 자리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손으                  로 엉덩이를 긁는 것 같다.)

  영호 왜 그래?
미스리 모기 땜에……! 히프가 막 우둘두둘해졌어. 모기가, 엉덩이만 집중적                  으로 무는 거 있지? (몸을 꼬며 웃는다.)

                 (영호의 발 밑으로 작은 공이 하나 굴러온다. 예닐곱쯤 된 사내아이가            영호에게 다가온다. 아이, 허리를 굽히고 영호의 발 밑에 떨어진 공을            막 집으려는데 개가 으르릉대는 듯한 소리 들린다.)

                 (아이가 고개를 들어보면 영호가 이빨을 드러낸 채 아이를 내려다보                  며 사나운 개가 위협하듯이 으르릉대고 있다. 그러나 아이는 그런 영                  호를 빤히 올려다보다가 다시 공을 집으러 한다. 다시 으르릉대는 영                  호. 그러자 영호를 올려다보던 아이도 이빨을 드러낸다.
                 두 사람 잠깐 맹수처럼 서로에게 으르릉댄다. 먼저 크아앙! 공격하는            작은 맹수. 큰 맹수가 멈칫 하는 사이에 작은 맹수는 공을 손에 넣고            일어난다.)

박명식  (O.S) 재영아, 아저씨한테 장난하면 못써!
                 (아이의 손을 잡아쥐며) 그러게 식당에서 공 갖고 놀지 말랬잖아. (영                  호에게) 죄송합니다.
  영호 괜찮아요. 애가 아주 귀엽네요.
                 (하다가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고 깜짝 놀란다.)
                 어?
박명식 (그 역시 영호를 보고 놀란다.) 어!
  영호 안녕하세요?
박명식 예, 안녕하세요. 오랜 만이네요.

                 (두 사람은 서로 웃으며 악수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태도는 왠지 모                  르게 어색하고 불편해 보인다.)

  영호 놀러 오셨나보죠?
박명식 예, 저…… 식구들끼리 오랜만에 밥이나 한 끼 할라고…….

                 (사내가 자기 식구들 쪽을 돌아본다. 저쪽 자리에 그의 가족이 보인                  다. 아내와 두 명의 아이들이 있다.)

박명식 요즘은 어느 경찰서에 계시나요?
  영호 저 경찰 그만 뒀습니다. 한 이년 전에 옷 벗고 나와서 지금 조그만                   사업하고 있습니다. (주머니를 만져보며) 아이고, 마침 명함을 안갖고            있네. (아이에게) 너, 몇 살이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러자 아이가 다시 이빨을 드러내며 맹                  수처럼 으르릉거린다. 영호 멋적게 웃는다.)

박명식 그럼 많이 드세요.

                 (영호, 걸어가는 두 사람을 잠시 바라보다가 자리에 앉는다. 앉자마자            갈증에 빠진 사람처럼 컵에 가득 맥주를 따뤄 마신다.)

미스리 누구예요?

                 (영호, 술을 한 번에 마신 뒤)

  영호 야, 술 맛 죽인다!

55. 화장실 (내부. 저녁) -------------------------------------------------

                 (영호 들어온다. 박명식이 변기에 서서 오줌을 누고 있다. 영호 약간                   당황하지만 그의 옆으로 가서 선다. 서로 어색하게 아는 체한다. 두                   사람 나란히 서서 오줌을 눈다.)

  영호 삶은 아름답다.
박명식 예?
  영호 삶은 아름답다! 그렇지요?
박명식 아, 예…….

                 (박명식 먼저 나간다. 계속 오줌을 누고 있는 영호.)

56. 식당 밖 (외부. 저녁) ------------------------------------------------

                 (화장실에서 나온 영호가 식당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미스 리에                  게로 걸어온다.)

                 (영호의 눈에 가족들과 함께 막 차를 타려는 박명식의 모습이 보인                  다. 영호, 손을 쳐들어 인사한다. 박명식도 이쪽을 보며 아는 체한다.)

                 (웃고 있는 영호의 얼굴.)

                 (박명식, 자기 아내에게 뭐라고 이야기한다. 그녀도 이쪽을 쳐다본다.                  영호는 여전히 그들을 보고 있다. 이윽고 차에 타는 박명식의 가족                  들.)

미스리 뭐 해요?

57. 차 안 (외부. 밤)----------------------------------------------------

                 (밤길을 달리는 차 안. 양수리 쪽 도로. 영호가 운전대를 잡고 있고,                   그 옆에 미스 리가 앉아 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카세트를 넣고 단                  추를 누른다.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 나온다.
                 미스 리는 백에서 뭔가를 꺼내 영호의 입에 먹이려 한다.)
 
  영호 뭔데?
미스리 박하사탕. 아까 음식점에서 준 거예요.
  영호 안 먹어.
미스리 먹어봐요, 입안이 상쾌해져요. (은밀하게 웃으며) 아까, 오빠 입에서                   냄새 나더라.
  영호 내가 왜 니 오빠야?
미스리 (눈을 흘기며) 사장니임!

                 (박하사탕을 영호의 입에 넣어준다. 영호에게 깨물 듯이 입을 갖다댄                  다.)

                 (사탕을 깨물어먹고 있는 영호의 얼굴 C.U.
                 겉보기로는 그의 표정이 그저 무심하게만 보인다. 이 모든 것은 아무            일도 아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한다. 입안에서 녹고 있는 박하사탕도                   아무 일도 아니다. 카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늘 듣던 음악처럼.)

58. 복도 (내부. 낮)-----------------------------------------------------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너댓명의 사람들이 내린다. 임사장과 미스            리를 비롯한 가구점 직원들이다. 각자 선물 꾸러미 같은 것들을 들고            떠들썩하게 영호의 집 쪽으로 걸어간다.)

59. 영호의 아파트 (내부. 낮)---------------------------------------------

                 (홍자가 달려와 아파트 현관문을 연다. 뽀삐가 콩콩 짖어대는 소리 들           린다.)

  홍자 어서 오세요!
직원 1 안녕하세요? 사모님.
임사장 축하합니다.
  홍자 고마워요. 어서들 오세요.
미스리 안녕하세요?

                 (시끌쩍한 소리와 함께 집들이 축하객들이 들어오고 나면,
                 현관문 안쪽에는 교회에서 만든 것 같은 장식용 팻말이 붙어 있다.
                 '샬롬. 이곳에 들어서는 모든 이에게 평화를'.)

60. 영호의 아파트 (내부. 낮)---------------------------------------------

                 (부엌에서 홍자와 미스 리가 음식상을 차리고 있다.)

미스리 (음식을 하나 손으로 집어먹어 보며) 맛있다! 이거 사모님이 혼자 다                   하신 거예요?
  홍자 파출부도 좀 썼지만, 혼자 한 셈이지 뭐.
미스리 좋으시겠어요. 이렇게 음식을 잘 하셔서.

                 (홍자와 미스리, 음식을 들고 거실로 나간다. 카메라 그들을 따라가면,
                 사람들이 음식상 주위로 모여 앉아 있다. 회사 직원들 뿐만 아니라                   홍자가 다니는 교회 사람들까지 와 있다.)

  영호 (자꾸 음식상에 붙는 뽀삐를 밀어낸다.) 저리 가! 저리 가, 임마!
임사장 제수씨, 얼릉 앉으세요. 건배해야지.
미스리 인제 이리 앉으세요, 사모님.

                 (마지막 음식 접시를 들고 홍자가 자리에 끼어 앉는다.)

직원 1 사모님은 여기 사장님 곁에 앉으셔야죠.
  홍자 아녜요, 아무 데나 앉죠, 뭐. (다른 자리에 앉는다.)
임사장 제수씨는 어떻게 갈수록 젊어지고 이뻐지셔?
  영호 (뽀삐를 신경질적으로 밀어버린다.) 저리 가라니까!
  홍자 개 좀 가만히 내버려둬요. (사람들에게) 세민이아빤 개가 미워 못 살                  아요.
  영호 난 개 싫어.
임사장 왜?
  영호 개니까.

                 (사람들 웃는다.)

임사장 (술잔을 치켜들며) 자, 새집에 이사오신 걸 축하합니다.
  홍자 건배하기 전에요, 우리 교회 집사님 오셨으니까 기도해주세요.
  집사 그럴까요?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기 시작하는 집사.)

  집사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 양홍자 권사님네 가족, 새 집                  으로 이사 오셔서 이렇게 아버지께 감사할 수 있는 시간 만들어 주시           니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듣고 있다. 기도는 장황하                  게 길게 계속된다.
                 영호만 눈을 뜨고 있다. 그는 혼자 눈을 뜬 채 사람들을 둘러본다. 임                  사장, 미스리, 아내……)

  집사 아버지 하나님 어린 양처럼 선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이 가족과 이 집            위에 축복 내려주시옵소서. 앞으로 이 가정에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                   믿으며 평화와 행복만이 가득할 수 있도록 능력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이집 가장인 김영호사장님 하시는 사업 보살펴 주시옵고……

                 (영호가 소리없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출입문 쪽으로 걸어간                  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눈을 감고 있으므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                   줄을 모르고 있다. 오직 세민이만 그의 뒤를 따라간다.)

61. 복도 (내부. 낮.)-----------------------------------------------------

                 (영호가 아파트의 문을 열고 나온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간다. 잠                  시 뒤, 아이가 나온다. 영호의 뒤를 따라간다.)

62. 엘리베이터 앞 (내부. 낮)---------------------------------------------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영호. 뒤에서 세민이가 다가온                  다. 아이는 그의 곁에 붙어선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마악 올라타려고 할 때, 영호는 세민이의            손이 자신의 바지를 꼭 움켜쥐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마치 아빠                  가 가지 못하도록 붙들고 있는 듯이.
                 세민이는 바지를 꽉 잡고 말없이 아빠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 그러                  나 영호는 아이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억지로 떼어놓는다.)

63. 엘리베이터 앞, 아래층 (내부. 낮)--------------------------------------

                 (땡, 소리와 함께 아래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면, 홍자가 세민이와            함께 걸어나온다. 아이는 훌쩍거리며 울고 있다.)

64. 주차장 (외부. 낮)---------------------------------------------------

                 (홍자가 아이와 함꼐 아파트 앞으로 걸어나와 남편을 찾지만 남편은                   보이지 않는다. 아파트 앞 주차장은 헹하니 비어있다. 그녀가 소리친                  다.)

  홍자 세민이아빠!

                 (텅빈 아파트 광장을 그녀의 쨍쨍한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려 퍼진다.
                 천천히 F.O.)

65. 열차 (외부. 낮)-----------------------------------------------------

                 (수초 동안의 암전 상태가 지난 뒤, 짧은 F.I.과 함께 달리는 열차의                   시점.
                 화면 앞으로 밀려오는 끝없는 철도 침목들, 선로 좌우의 숲들. 바람에            낙엽들이 떨어진다. 그러나 낙엽은 땅에서 거꾸로 치솟아 나무 위로                   가서 매달린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듯.
                 십여 초 정도 계속되다가 다시 암전.)

66. 작은 타이틀 (무지) -------------------------------------------------
                
                 (어둠 속에,
                 '고백'이라는 자막이 떴다가 사라진다.
                 이어서,
                 '1987년 1월'이라는 자막이 다시 떴다가 사라진다.)


67. 영호의 집(내부. 아침) -----------------------------------------------

                 (스물 여덟 살의 영호. 남의 집 이층에 세들어 살고 있다.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 신접살림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들의 살림살이는 씬60에서보다 훨씬 소박해 보인다. 겨울 아침의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다.
                 아내인 홍자는 만삭의 몸이다. 앉은뱅이 밥상에서 두 사람 식사를                   하고 있다. 영호는 방바닥에 펼쳐놓은 신문을 읽으며 밥을 먹고, 홍자                  는 그런 영호를 보고만 있다.
                 꽤 오랜 침묵.)

  영호 (밥 먹다말고 홍자를 쳐다본다.) 왜 그러고 있어?
  홍자 당신 먹는 거 보는 거예요.
  영호 사람 밥 먹는 거 처음 봐?
                 (계속 먹는다.)
  홍자 당신, 얼마 만에 집에서 밥 먹는 지 알아요?
                
                 (영호, 대답없이 게속 밥만 먹는다. 이윽고 밥을 다 먹고 물까지 마신            뒤, 서둘러 일어선다.)

  홍자 이따가 병원에 가볼려는데……

                 (문 밖으로 나서는 영호의 뒤를 따라간다.)
            (계단으로 내려가는 영호.)

  홍자 예정일은 일주일 남았는데, 아무래도 좀 이상해요.
                 (영호의 등에 대고)
                 이따 전화할께요.

                 (그래도 영호는 대답이 없다.)

  홍자 아이, 뭐라고 말 좀 해요!
  영호 (돌아보며) 전화 하지마!
                
                 (대문을 나가는 영호.)

68. 이발소 안 (내부. 아침) ----------------------------------------------

                 (이발소 의자에 앉아 머리 깎고 있는 영호. '아이롱파마' 견본 사진들,            계란 맛사지에 관한 안내문 등이 붙어 있는 큰 거울에 머리를 깎고                   있는 영호의 모습이 B.S. 정도로 비쳐있다.
                 거울에 비친 영호의 뒷쪽 넓은 공간은 조금 어둡다. 그곳에 보는 사                  람 없이 켜진 TV화면이 보인다. TV는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학생            데모에 관한 뉴스를 전하고 있다. TV 소음만 계속 들려오고, 이발사                  의 가위질 소리만 들릴 뿐 무척 한가롭고 조용하게 느껴진다.
            사이.
                 뒤쪽 어두운 공간에 벌거벗은 사내의 몸이 프레임인 되어 선 채로                    TV를 본다. 또 한 사내가 프레임인 된다. 그 역시 벌거벗고 있다. 따                  라서 우리는 이곳이 목욕탕 탈의실에 붙어 있는 이발소임을 알게 된                  다.
                 뒤에 나온 사내가 머리를 말린다.  TV 소리에 드라이어기의 소음이                   겹쳐진다. 영호의 시선은 계속 머리를 말리는 사내에게 가 있다. 이윽                  고 머리를 말린 사내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어두운 탈의실 쪽에서 밝                  은 이발소 쪽, 즉 카메라 앞쪽으로 다가오며 사내의 얼굴이 분명해진                  다.
                 그는 씬54의 박명식이다. 영호의 표정이 긴장한다. 그러나 박명식은                   영호에게는 관심없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머리 모양을 주의깊게 살핀           다. 머리를 요리조리 돌리며 이발할까 말까 보다가 아직 괜찮다는 듯                  이 돌아간다.)

  영호 (이발사에게) 이제 됐어요. 그만 하세요.
이발사 (같이 거울에 비친 영호를 보며) 아직 손질이 좀 덜 됐는데.
  영호 (머리를 돌려보며) 괜찮은데요, 뭐. 시간이 없어서요.

                 (이발사, 영호의 목에 두른 수건을 푼다.)

69. 골목 (외부, 아침) ---------------------------------------------------

                 (목욕탕과 이발소 표시등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골목. 목욕을 마친 박                  명식이 걸어 나온다. 기다리고 있던 영호가 그의 앞을 막아선다.)

  영호 박명식씨!
박명식 저 박명식 아닌데요.

                 (말을 마치자마자 달아나는 박명식. 영호, 그 뒤를 쫓아간다. 좁은 골                  목길 저쪽에서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다. 박명식은 아슬아슬                  하게 자전거를 피했지만, 몸의 균형을 잃은 채 쓰러진다. 영호가 쓰러                  져 있는 그에게 다가간다.
                 LONG SHOT. 박명식 영호를 쳐다본다. 말없이 쓰러진 박명식을 내려                  다보던 영호, 갑자기 발로 짓밟는다. 자전거를 세운 채 그 모습을 돌                  아보고 있는 아이.)

70. 남영동 취조실 (내부, 낮) --------------------------------------------

                 (취조실의 문이 열리고 영호가 들어온다.
                 취조실은 창이 높이 달려 있어서 낮인데도 대체로 어둡다. 취조실 한            가운데 책상이 있고 형사1이 앉아 있다. 책상 맞은 편 의자에는 박명                  식이 앉아 있다. 영호, 책상에 걸터 앉는다.)

  영호 (박명식에게) 생각 좀 해봤어?
                 (물고 있던 담배에서 재가 떨어진다. 바지에 묻은 담뱃재를 세심하게            털어내며) 응? 생각해봤냐구.
박명식 (영호를 외면한 채) 저는 정말 모르는데요. 모르는 걸 안다고 할 순                   없잖습니까?
  영호 모르는 걸 안다고 하면 안되지.
박명식 ……
  영호 (아직 그는 친한 친구에게 하듯 부드럽게 말하고 있다.) 그래도 잘 생                  각해보면, 생각나는 수도 있잖아.

                 (박명식, 여전히 앞만 보고 있다.)

  영호 어이, 내가 말할 때는 내 눈을 똑바로 봐야지. 응?

                 (영호의 얼굴을 쳐다보는 박명식.)

  영호 그게 에티켓이잖아.

                 (영호는 박명식의 얼굴을 귀엽다는 듯 토닥거리며 때린다. 맞은 박명                  식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영호 왜 기분 나빠?

                 (영호는 다시 박명식의 얼굴을 토닥거린다. 여전히 상대는 굳어있다.                   영호의 손길에 좀더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영호 내가 지금 기분 나쁘냐고 묻고 있잖아, 새꺄! 묻는데 왜 대답을 안해?

                 (한 대, 두 대, 박명식을 때릴 때마다 점점 격렬해지다가 나중에는 미                  친 듯이 정신없이 두들겨 팬다. 이윽고 때리길 멈춘다. 완전히 공포에            질린 박명식.)

  영호 앞으로 내가 물을 때는 즉각 대답해, 일초 내로. 알았어?
박명식 (겁에 질려 재빨리 대답한다.)예!
  영호 그래, 그래야지. 아프냐?
박명식 (재빨리) 아뇨, 예!
  영호 아파?
박명식 (재빨리) 예!
  영호 정직해서 좋다. 앞으로도 그렇게 정직하게 대답해.
형사 1 (박명식에게 영호를 가리키며) 이 아저씨 별명이 뭔지 알아?
                
                 (영호 박명식의 얼굴을 귀엽다는 듯이 토닥거린다. 싱긋 웃으며 그러                  다가 갑자기 박명식의 얼굴 가까이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간다. 이빨                  을 드러내더니, 개처럼 으르렁거리기 시작한다. 씬54에서의 그의 모습                  을 연상시킨다.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대는 그의 모습은 장난이라고 보기엔 너           무 진지하다. 정말 이빨로 박명식을 깨물 것 같다.)

71. 사무실 (내부, 오후) -------------------------------------------------

                 (사무실에서 영호와 다른 동료 두 명이 배달된 중국음식을 먹고 있다.            신문지를 깔아놓은 책상 위에 짜장면, 짬뽕 그릇들이 널려 있다. 그                   신문 지면에 정치상황에 관한 기사가 대문짝만한 제목으로 실려있다.            영호 짜장면 그릇을 들고 먹으며 눈으로는 그 기사를 읽고 있다.)

형사 1 어리숙한 게 겁 많게 생겼는데…….
  영호 저런 놈이요, 더 질겨요.
형사 1 오늘 저녁에 회식 있다고 그랬지?
형사 2 (영호에게) 참 김형사, 아까 집에서 전화 왔었는데. 병원에 왔는데, 출                  산할 때가 다 됐다고 입원하라고 하더래. 
형사 1 출산? 벌써 그렇게 됐나?
형사 2 인제 애 낳아봐라. 애 있을 때하고 없을 때하고는 차원이 달라요, 차                  원이.
형사 1 나 정말 애 때문에 학교 가봐야 되는데. 담임선생이 엄마 말고 꼭 아                  빠가 와야 된다고 했대.
형사 2 왜요?
형사 1 몰라. 또 무슨 사고 친 거지 뭐.
형사 2 요새 애들 아빠 말이라고 먹히나? 
형사 1 이놈의 중국집은 꼭 양파를 모자라게 줘요!
                
                 (대화를 하면서도 계속 식사를 한다. 그들의 대화는 이웃집 아저씨들                  처럼 지극히 일상적이다.)

72. 취조실 (내부, 저녁) -------------------------------------------------

                 (한껏 크게 틀어진 라디오 소리. 양희경이 진행하는 가요 프로그램이                  다.
                 CAMERA, 책상 위에 놓인 라디오의 CLOSE UP에서 천천히 TILT                   DOWN 한다. 바닥을 따라가면 흘러내리는 물, 그 물이 흐르는 곳을                   따라 계속 이동하면 누군가의 벌거벗은 발이 나온다. CAMERA, 벌거                  벗은 몸으로 계속 TILT UP. 물은 몸을 타고 흘러내려오고 있다.
                 그 동안에도 양희경의 목소리는 계속 들리고, 그 소리에 섞여 한 남                  자의 고통스런 신음이 들린다. 이윽고 박명식의 얼굴이 보인다. 그는                   지금 완전 나체 상태로 손을 뒤로 한 채 의자에 앉아 있고, 고개는                   뒤로 젖혀져 있다. 얼굴에 손수건이 덮여져 있는데 영호가 그 위에                   주전자의 물을 붓고 있다. 형사1이 그의 머리를 붙들고 있다. 물이 콧                  구멍에 들어갈 때마다 박명식은 꺽꺽 숨이 막혀 죽어가는 소리를 낸                  다.)

양희경 살다보면요, 본의 아니게 해서는 안되는 과오를 저지르는 수가 있잖                  아요. 그걸 또 상대방한테 숨기고 살기도 하고요. '세시의 가요앨범',                   오늘 이 시간에는 그런 사연들을 직접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 번                  째 전화 주신 분을 모시겠습니다. 여보세요.
청취자 (20대 여자의 목소리) 여보세요.
양희경 네, 어디 사는 누구세요?
청취자 여보세요.
양희경 말씀하세요. 어디 사는 누구세요?
청취자 연희3동에 사는 임상희라고 하는데요.
양희경 네, 임상희씨는 무슨 잘못을 지금까지 가슴에 파묻어두고 계셨습니                  까?
청취자 저는요, 한 3년 전에 친구를 속인 적이 있거든요.

                 (주전자를 놓고, 손수건을 박명식의 얼굴에서 떼는 영호.)

형사 2 너 폐기종이란 거 알아? (라디오 볼륨을 줄인다.) 폐기종.
                 폐에 물집 생기는 병 말야. 이거 고춧가루 물 폐로 들어가면 1,2년 뒤                  에 폐기종 생긴대. 우린 책임 못져.

                 (박명식, 고통스럽게 기침한다. 내장이 다 목구멍 밖으로 빠져나올 듯                  하다.)

형사 2 그러니까, 임마. 김원식이 어디 있는가만 빨리 말해. 10초면 끝나잖                  아?
박명식 저, 정말 모르거든요. 저도 말하고 싶어요.
형사 2 이 새끼 답답한 놈이네. 넌 운동권도 아니고, 빨갱이도 아니잖아. 넌                   얌전하게 공부만 하는 놈인데 왜 이 고생해? 이런다고 걔들이 알아                  줘?
박명식 (겁에 질린 어린애 같은 표정으로 애원하듯이) 모르니까 그렇죠. 전                   원식이형 근래 만난 적도 없어요.
  
                 (영호, 설합에서 약간 유치한 표지의 노트 한권을 꺼낸다.)

  영호 이거 니 일기 맞지?
박명식 맞아요……
  영호 여기 일기에 니가 썼잖아. 1월 7일 2시 원식이형, 13만원. 김원식이                   만나서 13만원 줬다는 얘기 아냐?
박명식 저…… (약간 당황해서 얼른 둘러댄다) 만나긴 만났는데요, 지금 어디            있는지는 몰라요.
  영호 (주전자를 들며 형사1에게) 잡아요.
형사 1 그만 하지, 시간 없는데…… 회식 가야잖아.
  영호 (신경질적으로) 아, 씨발! 일을 하면 끝까지 해야지, 회식은 무슨 회식                  이요?
                 (자기 손으로 박명식의 고개를 사납게 뒤로 누른다.)

73. 단란주점 안 (내부, 밤) ----------------------------------------------

                 (단란주점 안에서 회식 뒤의 술자리를 가지고 있는 영호와 동료들. 여           자들도 자리를 같이 하고 있다.
                 영호가 마악 노래를 시작하려는 중이다. 반주가 흘러나오고 있다.
                 영호, 손을 이마에 대고 멋지게 군대식으로 경례한다. 쏟아지는 박수.            노래를 시작한다. 유심초의 '사랑이여'.)

  영호 별처럼 아름다운 사랑이여. 꿈처럼 행복했던 사랑이여. 머물고 간 바                  람처럼 기약없이 멀어져 간 내 사랑아…….

                 (그의 목소리는 우울하면서도 달콤하다. 노래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아직 첫사랑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청년처럼 순수해 보인다. 여자                  들이 감탄하는 눈으로 그를 본다. 어떤 여자는 눈을 감고 한껏 감정                  에 도취되어 있다.)

  여자 너무 멋있다……

74. 화장실 (내부, 밤) ---------------------------------------------------

                 (약간 지저분한 단란주점의 화장실. 영호가 용변을 마치고 돌아선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본다. 거울로 천천히 다가온다.)

  영호 (거울에 비친 자신을 한참 보다가 조용히) 넌 이제 끝났어, 임마. 니                   인생은 끝장났다구. (거울에 바짝 얼굴을 대고 조롱하듯이) 알겠냐?

                 (영호, 이번에는 자신의 얼굴에 대고 손가락욕을 한다. 장난하듯이. 그           러나 그 장난은 점점 격해진다.
                 거울에서 멀어져 문 쪽으로 걸어가면서도 고개를 돌려 욕을 계속한                  다.)

75. 단란주점 안 (내부, 밤)-----------------------------------------------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었는지 형사들과 여자들이 깔깔대며 웃고 있                  다. 영호가 자리에 앉자, 여자들이 영호를 쳐다보며 더 웃는다.)

  영호 뭐야? 내 흉보고 있었어?
                 (옆의 여자에게) 무슨 흉 봤어? 응? (여자가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자) 말해! 말해, 이년아! (여자의 가슴팍에 손을 쑥 집어넣는다. 여                  자 캭캭거리며 몸을 뒤튼다.)

76. 단란주점 앞 (외부. 밤)-----------------------------------------------

                 (단란주점에서 나온 반장, 형사1, 2, 그리고 영호. 다들 술이 기분좋게            취한 것 같다.)

  반장 (하늘을 쳐다보며) 눈 올 것 같은 날씬데…… 어디 포장마차에 가서                   한잔만 더 하지.
형사 2 좋지요!
  영호 반장님, 전 들어가봐야겠는데요.
  반장 왜? 아, 집사람이 애 낳을라고 입원했다고 했지! 병원에 갈라고?
  영호 아뇨, 사무실로 들아갈라고요.
  반장 사무실? 늦은 밤에 왜? 술도 취했는데……
  영호 그냥요. 쓸쓸해서요.

                 (영호, 손을 올려 멋부린 경례를 하고 돌아서서 화면 앞쪽으로 프래임            아웃한다.)

 반장           (영호의 뒷모습을 보다가 형사 1,2를 돌아보며) 무슨 소리야?

77. 복도 (내부. 밤)-----------------------------------------------------

                 (휑뎅그레 비어있는 밤 늦은 경찰서 복도. 김영호가 혼자 걸어가고 있           다. 술이 취해서 약간 몸을 건들거린다. 혼자 노래를 흥얼거린다.)

78. 취조실 (내부 밤)----------------------------------------------------

                 (책상 앞에 앉아 몸을 깊게 수그린 채 울고 있는 박명식. 어린애와 같           은 설움에 겨운 울음이다.)
                
                 (영호는 맞은 편에 앉아서 그런 박명식을 한참 보고 있다.)

  영호 김원식이 군산 선배집에 있다는 거 거짓말 아니지?
박명식 (서럽게 흐느끼며) 절대 거짓말 아니예요.
  영호 임마, 진작 그렇게 불었으면 고생 안하지. 말하고 나니까 속이 후련하                  지?
                 (책상 위에 있는 두루말이 화장지를 뜯어서 박명식에게 던져준다.)
                 코 풀어.

                 (화장지로 눈물 닦고 코도 푸는 박명식.)

  영호 나 너한테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박명식의 일기장을 집어들고)
                 너 정말 삶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냐?
박명식 예?
  영호 너 여기 일기 보니까 그렇게 썼대. 삶은 아름다운 거라고. 정말 그렇                  게 생각해?

                 (박명식, 눈물에 젖은 얼굴로 말없이 영호를 쳐다보고만 있다.)

79. 차 안 (외부. 오후) --------------------------------------------------

                 (흐린 날씨의 오후. 전주 군산간 국도를 달리고 있는 차 안.
                 뒷자리에 형사1과 영호가 타고 있고, 앞자리에는 형사 2가 운전대를                   잡고 있다.)

형사 1 김형사는 군산에 아는 사람 있어?
  영호 없는데요. (창밖의 풍경을 말없이 보다가) 옛날에 내 알던 여자가 고                  향이 군산이었는데……
형사 1 알던 여자?
  영호 첫사랑 애인이요. 
형사 2 거짓말예요. 쟤는요, 여자 꼬실 때는요, 꼭 첫사랑 애인 이야길 해요.
형사 1 첫사랑 이야길 하면 여자가 걸려드나?
형사 2 그러게 말예요. 그러니까 희한하죠.

80. 군산항 부근 (외부. 오후)---------------------------------------------

                 (바다가 보이는 도로. 낡고 오래된 동네를 끼고 영호가 탄 차가 달린                  다. 진눈깨비가 흩날리기 시작한다.)

81. 골목길 (외부. 밤) ---------------------------------------------------

                 (허술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동네의 골목길.
                 영호 일행은 골목길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잠복근무를 하고 있다.
                 차창 앞으로 눈발이 하얗게 날리고 있다.)

형사 2 (몸을 떨며) 꼬라지 보니까 밤 꼬박 새우게 생겼네.

                 (영호는 뒷자리에 웅크리고 눈을 감고 있다.)

형사 1 (영호를 돌아보며) 김형사는 어디 여인숙에라도 가서 잠깐 눈 붙여.                   어젯밤에도 혼자 못잤잖아.
형사 2 그래. 이렇게 다 모여 있을 필요 어딨냐? 새벽에 교대해.

                 (영호, 말없이 차문을 열고 나간다.)

형사 2 (걸어가는 영호를 보며) 그런다고 수고하란 말도 없이 가냐? 하여튼,                   성질 좆같애요…….

82. 거리 (외부. 밤)-----------------------------------------------------

                 (눈이 내리는 텅 빈 해변 도로. 영호가 걷고 있다.)

83. 거리 (외부. 밤)-----------------------------------------------------

                 (여전히 눈발이 쏟아지고 있다. 영호, 혼자 어느 까페에 들어간다.)

84. 까페 안 (내부. 밤)---------------------------------------------------

                 (약간 촌스럽게 멋부린 작은 까페 안. 까페에 손님은 아무도 없고 20                  대 초반의 여자 혼자 카운터에 앉아 있다. 그녀의 맞은 편에 앉은 영                  호에게 여자가 술을 따르며 말을 건다.)

  경아 군산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영호 (말없이 여자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 시선에 여자가 조금 당황한다)
  경아 (얼굴을 붉히며) 일 때문에? 출장 오셨나 보죠?
  영호 사람 찾으러 왔어요.
  경아 어떤 사람을 찾아요? (영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아저씨 무슨 사연이            있는 분 같아. 그죠?
  영호 (쓸쓸한 미소를 짓는다.) …….
  경아 얘기해주세요, 아저씨. 눈도 오는데…… 심심해 죽겠어요.
  영호 내 첫사랑의 여자가요, 군산에 살고 있다는 이야길 들었어요. 군산 어                  디에 있는진 모르지만 하여튼 군산에 산대요.
  경아 (감동해서)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만나요?
  영호 만나려고 온 게 아니예요. 그냥……한 번 와보고 싶었어요. 그 사람이            사는 곳이니까……. 그 사람이 걸어 다니는 길을 나도 걷고, 그 사람                  이 보는 바다를 나도 보고…….
  경아 그런데 이렇게 눈이 와서 어떡해요?
  영호 괜찮아요. 그 사람하고 나하고 같은 눈을 맞고 있는 거니까. (눈이 내                  리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내가 보고 있는 눈을 지금 그 사람도            보고 있을 거니까.
  경아 ……. (할 말을 잃고 감탄한 듯이 남자를 보고 있다가 갑자기 까르르            참았던 웃음을 터뜨린다.) 아저씨 정말 사기 잘 친다!
  영호 (씁쓸하게 웃는다) 내가 사기치고 있는 것 같애?
  경아 그래도 아저씬 순수하고 착한 사기꾼 같애. 눈빛이 그래요. 아저                  씨 같은 눈을 가진 사람은요, 나쁜 짓 못해요.
                 (영호의 잔에 술을 채운다.)
                 아저씨, 오늘 내가 아저씨가 찾는 그 사람이 돼 드릴까요?

85. 술집 밖 (외부. 밤)---------------------------------------------------

                 (여전히 하얗게 눈발이 쏟아지고 있다.
                 술집 문이 열리고 영호와 여자가 나온다. 두 사람, 눈발 속으로 걸어                  간다. 여자는 아이처럼 웃으며 장난을 치기도 한다.)

86. 여자의 방 (내부. 밤)-------------------------------------------------

                 (어느 집 옥상에 있는 초라한 옥탑방. 열려진 방문으로 어지럽게 춤추           며 낙하하는 눈발이 보인다.)

                 (두 사람 벗은 몸에 이불을 둘러쓰고 나란히 앉아 열어둔 문으로 그             눈발을 구경하고 있다.)

  경아 아저씨, 아저씨가 찾는 그 분 이름이 뭐예요?
            
                 (영호, 잠깐 당황하는 것 같다.)

  경아 말해봐요.
  영호 …… 순임이. 윤순임.
  경아 이제부터 날 순임이라고 불러요. 진짜 순임씨 만났다고 생각하고 하                  고 싶은 말 다 해요. 자, 말해봐요.

                 (영호, 여자를 말없이 쳐다본다.)

  경아 말해봐요. 그토록 그리운 순임일 만났잖아요. 무슨 말을 하실래요?
  영호 (여전히 말이 없다.)
  여자 해요, 어서요.

                 (영호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여자의 진지한 얼굴.)

  영호 (O.S.) 순…… 순임씨.
  경아 네. (눈을 감는다.)

  영호 순임씨.
  경아 네.
  영호 순임씨.
  경아 네에!

                 (영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 여자의 얼굴. 사이. 갑자기 놀라는                   여자의 표정.)

                 (영호, 울고 있다.)

  경아 울지 말아요. 네? 울지 말아요.
                 (영호를 안는다. 그리고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말한다.) 나…… 당신                   마음 다 알아요.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요. (점점 자신의 감정에 겨워            울음이 섞인다.) 당신이 울면 나도 슬퍼요. 난 당신이 행복하기만을                   바랐는데…… 울지 말아요.

                
87. 골목길 (외부. 새벽) -------------------------------------------------

                 (이른 아침의 빈 골목길.
                 눈은 그쳤지만, 간밤에 내린 눈이 하얗게 쌓여 있다.
                 눈길을 밟으며 영호가 혼자 걸어간다.
                 저만큼 잠복중인 차가 서 있는 것이 보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그러다가 자신의 발자국            소리만이 아닌, 다른 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깨닫는다. 뒤를 돌아보는                   영호.
                 저만큼 뒤에서 어떤 사내가 걸어오고 있다. 영호, 다시 걷기 시작한                  다. 그러면서 약간 이상한 예감을 느낀다. 다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뒤에 오고 있는 사내도 이쪽을 쳐다본다. 동료들이 있는 차에 거의                   다 온 영호가 걸음을 늦춘다. 사내가 그의 곁을 지나간다. 지나가면서            힐끗 영호와 차를 본다. 계속 걸어가는 사내. 사내가 가는 방향에는                   수배자 김원식의 선배집이 있다. 그 자리에 서서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영호.
                 사내는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본다. 그 집 쪽으로 가는가 싶더니, 갑자                  기 뛰기 시작한다.)

  영호 왔어! 저새끼야!

                 (차문을 두드리고, 사내의 뒤를 쫓아간다.)

88. 언덕길 (외부. 새벽)--------------------------------------------------

                 (눈 쌓인 언덕길을 도망가는 사내와 쫓아가는 영호.
                 형사들 그 뒤를 쫓아간다. 그들의 모습은 아주 먼 거리의 롱샷으로                   보여진다.
                 영호가 수배자의 뒤에 따라 붙어서 발로 다리를 건다. 넘어지는 수배                  자. 영호가 달려든다. 그러나 수배자의 저항도 완강하다. 두 사람 사                  이에 잠깐 동안 격투가 벌어진다. 그러나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 일방                  적으로 수배자를 패는 영호. 주먹으로 때리기도 하고 발로 짓밟기도                   한다.)

89. 차 안 (내외부, 아침) ------------------------------------------------

                 (달리는 승용차의 뒷 좌석에 세 사람이 몸을 꽉 붙인 채 앉아 있다.                   끔찍하도록 얼굴이 피떡이 된 수배자 김원식의 왼쪽에 영호, 오른쪽                  에 형사1이 앉아 있다.           
                 김원식은 뒤로 수갑이 채워져 있다. 흔들리는 차체에 몸을 맡긴 채로            세 사람 다 말없이 정면을 쳐다보고 있다. 영호는 자주 시계를 들여                  다본다.)

형사 1 왜 자꾸 시계는 봐?
  영호 아침에 해장국 같이 먹으러 가기로 약속했거든요.
형사 1 군산에서? 누구하고?
  영호 첫사랑 애인하고요.
형사 1   (피식 웃으며, 김원식을 돌아보고) 얘 피나 좀 닦아주지.

                 (영호, 크리넥스 휴지통에서 휴지를 꺼내 김원식의 얼굴을 닦는다. 김                  원식은 피떡이 된 얼굴로 영호를 노려본다. 증오와 분노에 가득찬 그            눈빛이 영호를 질리게 한다. 그러나 그는 모른체하고 얼굴을 닦는다.                   휴지는 금세 피로 물든다. 휴지가 서너 장이나 필요하다. 김원식은 계                  속 영호를 노려보고 있다. 대충 피를 닦은 영호, 피로 물든 휴지를 처                  리할 곳이 없자, 창문을 내리고 창 밖으로 휴지를 버린다.)

                 (바람에 날려 펄럭이며 허공으로 흩어져 가는 피 묻은 휴지들.)

90. 바닷가 (외부. 아침)--------------------------------------------------

                 (눈 쌓인 겨울 바다를 배경으로 한 어느 해안거리.
                 길가 한쪽에서 경아가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 있다. 가끔 차량들이 지                  나갈 뿐,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다. 그녀는 자주 길 쪽을 돌아다본다.            초조하게 시계를 들여다보기도 한다. 이미 약속시간이 한참 지난 것                   같다.
                 결국 경아는 단념하고 걸어간다.
                 그녀가 걸어나가서 프레임 아웃하면, 이제 화면에는 아무도 없다.
                 황량한 바다 풍경을 배경으로 한, 빈 거리.
                 천천히 F.O.)

91. 열차 (외부, 오후) ---------------------------------------------------
                
                 (수초 동안의 암전 상태. 짧은 F.I.과 함께 달리는 열차의 시점.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끝없는 철도 침목들과 선로 좌우의 풍경들.
                 기차는 눈 속의 겨울 벌판을 달리고 있다.
                 그러나 눈발은 땅에서부터 하늘로 아스라히 날아 올라간다. 열차가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오륙초 정도 계속되다가 다시 암전.)

92. 작은 타이틀 (BLACK 무지) ------------------------------------------
                
                 (어둠 속에서,
                 '기도'라는 소제목이 떴다가 사라지고, 뒤이어
                 '1984년 가을'이라는 자막이 떴다가 다시 풍화되어 사라진다.)

93. 공터 (외부, 아침) ---------------------------------------------------

                 (서울 외곽, 어느 공단지역의 공터.
                 영호가 밥을 대어먹는 식당이 보이고, 그 뒤쪽으로 우중충한 공장건                  물, 굴뚝 같은 것이 보인다. 멀리 가끔 전철이 지나가기도 한다.  카                  메라 고정된 상태의 Extreme long shot. 
                 화면 바깥에서 여자의 웃음소리, 또는 뭔지 모를 힘쓰는 소리 등이                   들리다가, 카메라 앞, 화면의 왼쪽에서 자전거를 탄 스무살 초반으로                   보이는 홍자가 프래임 인 한다. 화면을 가로질러 오른쪽으로 간다. 화                  면에 꽉 차는 F.S. 그러나 자전거를 처음 배우는지 위태롭게 비틀거리           다가 결국 넘어진다. 혼자 욕을 하고, 혼자 웃기도 한다. 화면 오른쪽                  에서 영호가 프레임 인 해서 식당 쪽으로 걸어간다. 홍자가 지나가는            영호를 본다.)

홍자           오빠!

                 (영호,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다. 스물 다섯의, 늘 말이 없는 청년. 홍                  자가 좋아할 만한 타입이다.)

홍자           자전거 좀 배워줘요!
영호           (잠시 보다가) 시간 없어. 빨리 밥 먹고 출근해야돼.
홍자           잠시만! (그러나 이미 영호는 걸어가고 있다.) 5분만!

                 (홍자, 자전거를 끌고 투덜거리며 영호의 뒤를 따라간다.)


94. 홍자네 식당 (내부. 아침)---------------------------------------------

                 (꽤 넓은 서민용 식당.
                 아침 시간이라 식당은 비어있고 영호 혼자 밥을 먹고 있다. 밥을 먹                  으면서 머리를 기울여 신문을 보고 있다. 안에서 홍자가 나와 영호의            곁으로 다가온다.)

  홍자 밥 좀 더 드려요?
  영호 (여전히 눈은 신문을 향한 채) …… 됐어.
        
                 (홍자는 그런 영호가 답답하다. 건너편 자리에 앉아서 영호를 보고 있           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신문을 뺐어 버린다.)

  홍자 밥 먹을 때 신문 좀 그만 봐요! 
  영호 왜 이래!
                
                 (다시 신문을 가져가는 영호.
                 사이.)

  홍자 오빠, 오빠는 왜 경찰이 되셨어요?
  영호 모르겠어.
  홍자 몰라요? (웃는다) 본인이 모르면 누가 알아요? 내가 보기엔요, 오빠는            경찰하고는 안 어울려요. 전혀 이미지가 아니예요.

                 (영호는 대답이 없다. 식당 문이 열리고 강형사가 들어선다. 30대 초                  반 정도. 그는 영호의 자리 쪽으로 다가온다.)

강형사 늦었다! 빨리 밥도!

                 (영호의 앞자리에 앉는 강형사. 홍자, 일어나서 강형사의 앞자리를 약                  간 치워준다. 강형사가 홍자의 손으로 엉덩이를 만진다.)

  홍자 (소리지르며 강형사의 손을 친다) 왜 이래요, 아저씨!
강형사 (낄낄거리고 웃으며) 쟈는 만질 때마다 소리지르고 놀래.

95. 취조실 (내부, 오후) -------------------------------------------------

                 (취조실 한쪽에 영호가 앉아 있다. B.S 정도. 누군가의 비명 소리와                   고함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고문하고 있는 듯한 소리.
                 CAMERA는 영호의 모습에 계속 고정되어 있다. 영호는 화면 앞쪽,                  소리나는 쪽을 보고 있다. CAMERA 약간 라운드 트랙킹하며 소리                  의 주인공들이 화면 앞 쪽에서 프래임 인 된다. 그러나 망원렌즈로                   잡힌 영호의 표정만 선명하게 보일 뿐, 때리고 맞는 모습은 근경에서            포커스 아웃된 상태로 보여진다. 폭력은 직접 보여지지 않으면서도                   그 공포와 잔인성은 소리와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영호의 표정으로                   생생하게 전달된다.
                 디졸브.)

96. 공터 (외부, 아침) ---------------------------------------------------

                 (앞 장면에서 디졸브되는 홍자네 식당 앞 공터. X.L.S.
                 홍자가 영호에게 자전거를 배우고 있다.)

                 (B.S. 정도. 홍자 자전거를 타고 있고, 영호가 뒤에서 밀어주고 있다.
                 CAMERA, 같은 속도로 물러나며 그들의 모습을 잡고 있다.)

  홍자 오빠.
                 (대답이 없자, 버럭 소리지른다.)
                 오빠!
  영호 왜?
  홍자 아유, 답답해, 답답해. 이따가……저녁에 극장구경 안 갈래요?
  영호 안돼. 늦게 끝나.
  홍자 밤에도 괜찮아요. 영흥극장에 심야극장 한데요. '바람난 도시'.
  영호 다큰 처녀가 심야극장이나 가고 그러면 돼? 
  홍자 통금도 없어졌잖아요.
  영호 통금이 문제야? 처녀가 사고 날라고.
  홍자 (흥미있다는 듯이) 사고? 무슨 사고요?

                 (영호, 자전거를 밀고 있던 손을 놓아버린다. 자전거는 혼자서 달려간                  다. 홍자, 겁이 나서 비명을 지른다.)
                 (빠르게 달려가다가 결국 쓰러지는 자전거.)

97. 복도 (내부, 오전) ---------------------------------------------------

                 (취조실 바깥의 경찰서 복도.
                 강형사, 영호, 형사 3이 종이컵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고 있다.)

강형사 어때? 좀 적응이 되나?
  영호 예.
형사 3 김형사, 이 동네 공장에 다닌 적 있다 그랬지?
  영호 예, 군대 가기 전에…… 한 4,5년 전에요……
형사 3 그럼 노조 문제는 좀 알겠네? 이번에는 김형사가 해보지.
  영호 전 한 번도 안해봤는데…….
강형사 (어깨를 치며) 야, 누구는 첨부터 아나? 하면서 배우는 거지.

98. 취조실 (내부, 오후) -------------------------------------------------

                 (문이 열리며 세 사람이 들어온다.
                 강형사, 화면 앞쪽을 향해 소리친다.)

강형사 야! 자나? 자?
                 (상대방은 대답이 없다. 화면에서 보이지 않는 상대방을 향해) 인자                   또 시작해야지.
형사 3 (영호에게) 김형사가 해.          
                
                 (영호, 천천히 다가온다.)

강형사  (영호를 응원하려고) 너 인자 죽었다. 이 친구 성질 정말 더러븐 친구                  야. 성질 건드리지 마.
 
                 (CAMERA, 천천히 다가오는 영호를 따라 트래킹하면서 거의 CLOSE            UP 정도로 긴장된 영호의 표정을 잡는다.
                 영호 노조원에게 몸을 구부린다. 노조원의 뒷 머리만 화면에 들어온                  다.)

   영호 (노조원의 귀에 대고) 제발…… 빨리 불어라…… 응? 제발 빨리 불어                  라……
                
                 (영호의 표정은 거의 애원하는 듯하다. 물론 노조원은 그의 심정을 이           해 못하고 있다. 영호, 잠깐 노조원을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힘을 쓰는            듯하다. 어디를 어떻게 했는지 노조원이 찢어지는 비명을 지른다. 영                  호 계속 힘을 쓴다. 노조원 몸을 뒤틀며 소리를 지른다.)

  영호 (계속 힘을 쓰며) 왜? 왜……고집을 부려? 이 병신새끼야!
                 니가 뭔데……왜 고집을 부려……
                 (마치 견딜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 듯 그의 동작과 목소리는 격렬                  해진다. 동작이 격렬해질수록 호흡도 거칠다.)
                 그게 그렇게 대단해? 응? 왜? 왜애?

                 (영호의 움직임은 제대로 보여지지 않는다. 그의 표정, 점점 광기에                   사로잡혀가는 그의 표정이 보일 뿐이다. 뒤쪽에 약간 놀란 얼굴로 보                  고 있는 강형사와 형사3의 얼굴이 보인다.
                 갑자기 영호가 동작을 멈춘다.)

  영호 (아래를 내려다보며) 이게 뭐야?
                 (천천히 손을 든다. 손에 오물이 잔뜩 묻어있다. 영호,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손을 내려다본다.)

99. 화장실 (내부, 오후) -------------------------------------------------

                 (영호, 세면대 앞에 서서 손을 씻고 있다. 손에 배인 냄새를 맡아보면                  서 몇번이고 계속 씻는다. 그러나 냄새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 같                  다. 강형사가 들어온다.)

강형사 어이, 김형사! 잘하던데. 응? 소질있어. 체질이야.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변기 쪽으로 걸어간다. 영호는 계속 손을 씻           고 있다. 거울에 비친, 변기에 오줌을 싸고 있는 강형사. 강형사는 오                  줌을 싸면서 고개를 돌려 영호를 보고 있다.)

강형사 누가 찾아왔더라.

                 (영호, 거울을 통해 강형사를 본다.)

강형사 여자야.
  영호 ……

강형사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다) 애인 같던데?

100. 경찰서 외부 (외부, 오후) -------------------------------------------

                 (1층 현관 가까운 건물 사이의 통로.
                 걸어오던 영호가 누군가를 발견한 듯 걸음을 멈춘다. 약간 몸을 숨긴            채 보고 있다가 옆에 있는 벤치에 앉는다. 고개를 숙인 채 오래 그                   자리에 앉아 있다.)

101. 경찰서 마당 (외부, 오후) -------------------------------------------

                 (가을꽃이 피어 있는 경찰서 마당의 화단.
                 순임이 화단 턱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오래 기다린 눈치다.
                 이윽고 화면 오른쪽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영호가 프래임 인 한                  다. 그를 향해 활짝 웃는 순임. 그러나 영호의 표정을 보고 그 웃음은            천천히 스러진다. 두 사람 말없이 한참 그 자리에 서 있다. 순임이 어                  쩔 줄 몰라 한다.)

102. 홍자네 식당 (내부, 오후) -------------------------------------------

                 (초조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홍자.  B.S. 그녀의 시선을 따라
                 CAMERA 약간 PAN하면 식당의 한쪽 자리에 순임과 영호가 마주 앉                  아 있다. 홍자는 두 사람이 몹시 신경이 쓰인다.)

  영호 나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았어?
  순임 집에…… 영호씨 고향집에 찾아 갔더랬어요.
  영호 왜?

                 (순임, 영호를 말없이 쳐다본다. 할 말이 많지만 무슨 말부터 해야 할                  지 모르는 표정이다.)

  순임 영호씨 식구들이요, 영호씨가 왜 경찰이 됐는지 모르겠대요.
  영호 (홍자 쪽을 돌아보고) 여기 마실 것 좀 줘요!
  순임 손.
  영호 응?
  순임 영호씨 손이요.
  영호 (자기 손을 보며) 내 손이 왜?
  순임 (억지로 웃으며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 노력한다) 아까부터 영호씨                  가 아니라 꼭 딴 사람 같았어요.           
                 그런데 손 보니까 영호씨 맞네요. 영호씨 손 독특하잖아요. 손가락 끝                  이 뭉툭하고, 못생겼는데 참 착하게 보이는 손. 난 맨처음 영호씨 만                  났을 때 영호씨 손보고, 이런 손 가진 사람이니까 마음이 참 착할 거                  라고 생각했어요.
  영호 맞아. 내 손 참 착해요.

                 (두 손을 순임 앞에 장난하듯 까불거린다. 그 시니칼한 어조가 그녀를            당황하게 한다.)

                 (홍자가 술을 가지고 온다. 영호가 손으로 홍자의 엉덩이를 슬쩍 만진           다. 마치 앞에서 강형사가 그러듯. 처음에는 순임이 보지 못한다. 다                  만 홍자만 몹시 당황했을 뿐이다. 영호의 손이 더 대담해져서 이번에                  는 치마 아래로 내려가 허벅지 쪽을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홍자, 얼굴                  이 빨갛게 물들면서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린다. 그 바람에 순임도            홍자의 허벅지에 가있는 영호의 손을 본다.)

  홍자 (어쩔 줄 몰라서) 왜, 왜 이래요? 오빠……
  영호 (홍자를 쳐다보며 태연하게 웃는다) 전부터 한 번 만져보고 싶었어.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다가 자리를 떠난다.)

  영호 (순임 앞에 자기 손을 까불거리며) 착하지?

                 (순임은 놀라움과 충격으로 얼굴이 굳어진 채 영호를 보고만 있다. 두            사람 잠시 말없이 서로를 쳐다본다.
                 사이.
                 영호, 할 말이 없다는 듯이 웃기 시작한다. 위악적인, 소리없이 배만                   쿨럭거리는 그런 웃음이다.)

                 (순임,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 놓는다. 검은 가죽 케이                  스에 든 카메라 하나. 영호, 이게 뭔가,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본                  다.)

  순임 카메라예요. 비싼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거 사느라고 꽤 오래 돈                  을 모았어요.
            (억지로 웃으려고 한다. 그녀로서는 매우 힘든 말을 하고 있는 것이                  다.)
                 영호씨, 사진 찍고 싶어했잖아요.
  영호 (잠시 멀거니 순임을 쳐다보다가) 나 이제 이런 거 필요없어.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는 두 사람. 사이. 영호가 다시 장난스럽게 두                   손을 들어 까불거려 보인다.)

                 (굳어있는 순임의 표정.)

                 (카운터에 앉아 있는 홍자. 안정을 찾지 못하고 종이 위에 하릴없이                   뭔가 끄적거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 쪽을 쳐다본다.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다. 앞에 놓인 술도 마시지 않는다.
                 두 사람의 그 침묵이 홍자를 견딜 수 없게 만든다. 그녀는 등 뒤에                   놓인 라디오를 켠다. 갑자기 고음의 음악이 터져나오자 깜짝 놀라 황                  급히 소리를 죽인다. 그런데도 두 사람 쪽은 아무런 반응도 없다. 홍                  자는 이리저리 라디오의 소리 높낮이를 조정한다.
                 여전히 두 사람은 말 한마디 없이 앉아 있다. 마침내 홍자는 소리를                   아주 죽이고 만다.
                 이윽고 두 사람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다가온다.)

  홍자 술, 하나도 안 드셨는데…….
  영호 이따가 밤에 우리 만날까?
  홍자 (뭐라고 대꾸해야 좋을지 몰라 순임을 쳐다본다.)
  영호 (다짐하듯) 밤에 만나. 내 영화구경 시켜줄게.

                 (순임, 말없이 먼저 밖으로 나간다.)

                 (홍자의 시점으로 유리문 바깥의 길에 서 있는 두 사람이 보인다. 그                  들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다.
                
103. 공터 (외부, 오후) --------------------------------------------------

                 (식당 앞 길에 서 있는 두 사람. 사이.
                 영호가 사진기를 순임에게 내민다. 순임이 그것을 받아든다. 그녀는                   아무 말이 없지만 그녀를 사로잡은 그 어찌할 수 없는 절망감은 느낄            수 있다. 이윽고 순임이 돌아서서 걸어간다. 영호가 그 모습을 보고                   있다. 순임이 프레임 아웃 된 뒤에도 영호는 한참 그러고 서 있다. 이                  윽고 그 역시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 프레임 아웃된다.)

104. 식당 (내부, 저녁) --------------------------------------------------

                 (늦은 저녁의 홍자네 식당.
                 7,8명의 형사들이 모여 앉아 회식을 하고 있다. 한창 분위기가 고조되                  어 있다. 강형사가 일어서서 노래를 하고 있다. 하남석의 '밤에 떠난                   여인'을 지나치게 바이브레이션을 섞어서, 자기도취적으로 부른다.)

강형사 하얀 손을 흔들며 입가에는 예쁜 미소 짓지만
                 커어다란 검은 눈에 가득 고인 눈물 보았네에

                 (젊은 형사 하나가 일어나서 '보았네에'하며 후렴을 복창한다.)

강형사 차창 가에 힘없이 기이대어 나의 손을 잡으며
형사 4 (벌떡 일어나) 잡으며!
강형사 안녕이란 말 한마디 다 못하고 돌아서 우네
형사 4 돌아서 우네!

                 (영호는 술자리의 한쪽에서 말없이 술만 마시고 있다.)

  홍자 (영호의 옆으로 다가와) 오빠, 취했어요. 그만 해요.

                 (홍자는 술을 나르느라고 바쁘다. 자기 곁을 지나가는 홍자를 강형사                  가 붙잡는다. 홍자는 강형사의 손을 뿌리치려 하지만, 강형사는 홍자                  의 팔을 붙들고 불루스 동작으로 춤추며 노래를 계속한다. 사람들이                   더욱 소란해진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영호, 느닷없이 소리지른다.)

  영호 동작 그만!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영호 동작 그마안!

                 (비로소 사람들이 영호를 쳐다본다. 그러나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                  하고 있다. 강형사는 여전히 신나게 노래부르며 춤춘다.)

                 (영호의 눈빛이 심상치 않게 빛난다.)

  영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동자악 그마아안---!

형사 3 왜 이래? 취했어?
강형사 어, 저 친구 와 저라노?
  홍자 오빠!

                 (사람들이 놀라 그를 쳐다본다. 영호의 눈에는 광기가 어려 있다. 그                  는 계속 소리 지르며 구령을 외친다.)

  영호 중대애 차려엇──!
형사 4 어쭈구리!

                 (사람들은 비실비실 웃기도 하고 놀라기도 한다. 물론 그의 구령에 따           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자 그는 옆에 있던 봉걸레 자루를 집                  어들고, 사람들을 후려패기 시작한다.)

  영호 동작 봐라? 중대 차렷이란 말이 안 들리나? 중대 차렷!

                 (사정없이 휘두르는 봉걸레 자루를 피해 사람들은 소리 지르며 달아                  나기 시작한다. 영호의 눈빛으로 봐서 분명 장난이 아니다. 미친 것이                  다. 미친 놈이니 우선 피하고 보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한다.
                 술자리는 금방 난장판이 된다.)

  영호 열주웅 쉬엇──!

                 (영호는 계속 구령을 외친다. 그리고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자, 다시                   봉걸레 자루를 들고 달려든다. 웃으며 달아나는 사람도 있고, 붙잡으                  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성난 소처럼 날뛰는 영호를 감당하기가 쉽                  지 않다. 홍자가 그런 영호를 보고 발을 구른다.)

  홍자 오빠……

                 (탁자와 의자들이 넘어지고 밀려나서 난장판이 된 식당 한가운데 영                  호가 혼자 서 있다.)

105. 여관방 (내부. 밤)--------------------------------------------------

                 (좁고 누추한 여관방. 문이 열리고 누군가 어두운 방으로 들어선다.
                 불이 켜지고, 영호와 홍자가 들어선다. 이 장면은 씬50과 비슷한 앵글                  로 CAMERA 고정되어 있다.
                 영호는 아직 술이 많이 취한 상태고 홍자가 그를 부축하다시피 하고            있다.           
                 영호가 선 채로 홍자를 끌어안는다. 정신없이 입을 맞추고, 몸을 더듬                  다가 갑자기 홍자가 그의 몸을 밀어낸다.)

  홍자 잠깐만요, 오빠. 이런 식은 싫어요. 우선 목욕부터 하고요.

                 (홍자는 옷을 입은 채로 욕실로 들어간다. 욕실은 유치한 꽃무늬가                   되어 있는 유리문으로 가려져 있어서 홍자의 모습이 반투명으로 비쳐            보인다.)

                 (유리문 너머로 홍자가 옷을 벗는 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옷을 하나                  씩 벗을 때마다 문을 빼꼼 열고 내어놓는다. 멍청하게 서 있던 영호                  도 옷을 벗기 시작한다. 그리고 침대에 들어간다.)

                 (물소리와 함께 홍자가 샤워를 하고 있는 모습. 문이 빼꼼 열리고 홍                  자의 소리가 들린다.)

  홍자 눈 감아요!

                 (홍자가 벗은 몸으로 욕실문을 나온다. 그녀는 재빨리 침대 위 영호                  의 곁으로 들어가서 시트로 몸을 가린다. 영호가 안으려 하자, 그녀는            그를 밀어낸다.)

  홍자 잠깐만요.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영호를 쳐다본다.)

  홍자 오빠, 우리 기도해요.
  영호 난 기도할 줄 몰라.
  홍자 기도하는 거 뭐 어려워요? 나 따라 해봐요. 손 이렇게 하고. 이렇게.
  영호 난 못해.

                 (그래도 그녀는 영호의 두 손을 모아주고 혼자 기도를 시작한다.)

  홍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기억이 잘 나지 않는지 약간 더듬거린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음,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오시며…

                 (카메라는 부감으로 침대 위에 누운 두 사람을 잡고 있다. 홍자는 두            손을 모은채 우스꽝스러울만큼 진지하고 간절하게 기도한다. 그녀의                   두 눈은 카메라 쪽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그런 홍자의 곁에서 영                  호 역시 카메라 쪽을 쳐다보고 있다. 마치 기도의 상대인 하나님을                   쳐다보듯이. 그러나 두 사람의 표정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홍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죄 지은 자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홍자의 간절한 기도가 이어지는 동안,
                 천천히 F.O.)


106. 열차 (외부. 오후)--------------------------------------------------

                 (수초 동안의 암전 상태가 지난 뒤,
                 짧은 F.I.과 함께 달리는 열차의 시점. 선로 주변의 풍경은 연초록 봄                  빛으로 물들어 있다. 그리고 가는 빗발이 그 연초록빛을 무수한 빗금                  으로 지우고 있다. 그러나 비는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듯하다. 시간                  을 거꾸로 가는 듯.
                 이윽고 다시 천천히 암전.)

107. 작은 타이틀 (BLACK 무지) -----------------------------------------
                
                 (어둠 속에서,
                 '면회'라는 자막이 떴다가 사라진다. 이어서,
                 '1980년 5월'이라는 자막이 다시 떴다 천천히 사라진다.)

108. 위병소 앞 (외부. 오후)----------------------------------------------

                 (산 밑에 위치한 어느 전방부대의 위병소. 초록빛이 부대 주변의 산                  야를 물들이고 있다.
                 위병소 옆에는 숫자로 된 부대 이름과 함께, "초전에 박살하자!", "멸                  공!"이라는 커다란 입간판이 위협하듯 서 있다. 별로 크지 않은 부대                  인 듯 연병장 너머 산그늘 속에 엎드린 몇 개의 막사가 눈에 띈다.)

                 (부대 앞으로는 비포장 군사도로가 들 사이로 멀리까지 뚫려 있다.                   그 길을 따라 한 젊은 여자가 걸어온다. 스무 살 무렵의 순임. 전방부                  대 위병초소의 삭막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의 모습은 더욱 가냘프고                   앳띠어 보인다. 그녀는 M16 소총을 든 위병보초를 쳐다보다가 쭈볏                  쭈볏 위병소 쪽으로 다가간다.)

  하사 어떻게 왔어요?

                 (위병소 안에 있던 두 명의 병사가 그녀를 쳐다본다. 한 명은 하사고            한 명은 고참병장이다.)

  순임 면회 왔는데요.
  하사 면회 안돼요, 아가씨.
  순임 예? 왜요?
  하사 지금 면회금지예요. 부대가 비상이 걸려 있거든요.
  순임 (어찌할 줄 모르는 막막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도…… 어떻게 안될까요? 잠깐만이라도…… 여기까지 오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다고요. 
  병장 (약간 흥미를 가지고) 면회 할 사람이 누군데요?
  순임 김영호씨요. (손안에 꼬깃꼬깃 접힌 쪽지를 들여다본다.) 5중대 3소대                  요.
  하사 면회 안돼요. 돌아가세요, 아가씨.
  순임 멀리서 왔어요, 아저씨. 잠깐만이라도 보게 해주세요.
  병장 아가씨 어디서 왔는데요?
  순임 서울이요.
  병장 서울이 다 아가씨 집인가? 서울 어디요?
  순임 구로구 가리봉동……이요.

                 (짖궂은 병장은 심심풀이 장난으로 계속 묻고 순임은 순진하게 꼬박                  꼬박 대답한다.).

  병장 어떤 관계요?
  순임 예?
  병장 아가씨하고 어떤 관계냐고요.
  순임 (순임은 대답없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다가 곧 새침해진다.)
  병장 아가씨 미안하지만, 면회 안돼요.
  순임 아저씨, 부탁이예요. 어떻게 안될까요?
  병장 어떻게 되긴 뭐가 돼요? 군대서 안된다면 안되는 거요. 까라면 까는                   거요. 아가씨, 지금 계엄령이에요. 계엄령 내리고 비상이 걸렸어요. 아                  가씨는 신문도 안봤어요?

                 (순임은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녀는 막막한 표정으로 연병장 너머 부                  대 막사를 바라본다. 
                 위병소의 유선전화기가 따르륵, 따르륵 울린다. "충성! 통신보안 위병                  소 박병장입니다!"라는 소리도 들린다.)

109. 내무반 (내부. 오후)-------------------------------------------------

                 (내무반 안. 병사들이 정신없이 바삐 움직이고 있다. 비상 출동명령이            내려져서 완전군장을 꾸리고 있는 것이다. 관물대에서 반합이 떨어지                  고 철모가 내구르는 소리, 고참들의 고함소리 등으로 내무반 안은 정                  신없이 혼란스럽다.)

분대장 (한 신병을 발로 차며 소리친다.) 동작봐라! 동작 봐! 빨리 빨리 안해?          
                 (그 신병은 김영호다. 정신없이 움직이지만, 제대로 되지 않는다. 졸병           인 그는 아직 여러모로 군대생활에 제대로 적응을 못하는 눈치다.)

110. 내무반 밖 (외부. 오후)----------------------------------------------

                 (내무반 문 밖으로 뛰어나오고 있는 병사들.
                 완전군장을 꾸린 채로 병사들은 트럭에 탑승한다. 앞에서 누군가 외                  치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 빨리 승차해! 빨리!

111. 트럭 안 (내부. 오후)------------------------------------------------

                 (털털대며 달리고 있는 트럭 안. 포장이 쳐진 트럭에 병사들이 양쪽으           로 붙어 앉아 있다.
                 일병 김영호도 조금 얼이 빠진 표정으로 고참병사들 틈에 끼어 앉아            있다. 눌러쓴 철모가 자꾸 눈을 가린다.)

박상병 어디로 가는 거고?
병사1           몰라.
박상병 분대장님,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분대장 임마, 어디로 가는진 알아서 뭐 할래?
박상병 부대 떠나니까, 좋다! 시팔! 어디로 가든!

                 (갑자기 병사들이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병사들                  은 모두 고개를 내밀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영호도 고개를 돌려 트럭 뒤쪽을 본다.)

                 (숲 사이로 하얗게 뚫린 비포장도로를 한 젊은 여자가 홀로 걸어가고            있다. 면회 왔다가 그냥 돌아가는 윤순임이다. 영호는 그녀를 알아본                  다. 그녀는 트럭과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지만, 트럭이 달릴수록 점점            멀어지고 있다.)

                 (병사들은 모두 자기 애인이나 되는 듯이 소리를 지르고 휘파람을 불                  며 농담을 던진다. 그런 동료들 틈에서 영호는 말없이 순임을 보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이쪽을 보지 않고 외면하고 있다.
                 영호는 순임을 부르고 싶지만 웬일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저                   점점 멀어져 가는 그녀의 모습을 절망적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흔들리는 트럭에서 보는 시점.
                 하얀 길 가운데 외로이 걷고 있는 순임의 모습, 점점 멀어진다.)

112. 광주 비행장 (외부. 밤) ---------------------------------------------

                 (어둠. 한쪽에서 요란한 헬기 소리가 들리는 속에 병사들이 도착하고            있다. 캄캄한 어둠과 헬기의 굉음 속에서 병사들의 움직임은 몹시 급                  박하고 혼란스럽다.)

                 (주위는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어둡고, 헬기의 프로펠                  라가 일으키는 강풍으로 눈조차 뜨지 못한다. 어둠 속에서 "앉아번                  호!"가 실시되고, 지휘관이 큰소리로 명령을 내리는데 무슨 소린지 정           확히 전달되지도 않는다. 병사들은 그저 불안과 혼란 속에서 이리저                  리 내몰리고 있을 뿐이다. 그 속에 김영호 일병의 모습이 보인다. 시                  커먼 검뎅이 칠해진 얼굴로 눈동자만 불안하게 움직이고 있다. 여전                  히 철모가 자꾸만 눈을 가린다.
                 앞쪽에서 들리던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소리가 점점 다가와 영호의                   앞에까지 온 뒤, 이번에는 영호가 악을 쓰며 소리친다.)

  영호 열두울! 번호 끝!

113. 광주 외곽 (외부. 밤)------------------------------------------------

                 (어둠 속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는 영호의 얼굴  CLOSE UP.
                 캄캄한 어둠 속에서 긴장과 불안에 찬 눈빛만 빛난다.
                 사위는 매우 조용하다. 가끔 작은 바람소리에도 그는 깜짝 놀라며 어                  둠 속을 주시한다.
                 멀리서, 아스라이 확성기 소리 같은 것이 바람에 아련히 실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사이.
                 무슨 소리가 들려 재빨리 몸을 수그린다. 소총의 노리쇠를 장전한다.)

  영호 (숨죽인 소리로) 누구야!

                 (그의 앞 어둠 속에 사람의 검은 윤곽이 있다.
                 어둠 속에, 한쪽에 개천이 흐르고 있는 광주 외곽의 변두리 골목길이            보인다.)

박상병 (작은 소리로) 나야.
  영호 호텔!
박상병 나라니까!
  영호 호텔!
박상병 베개!

                 (박상병이 몸을 구부리고 가까이 다가온다.)

박상병 시팔…… 혼자 있을래니까 와 이래 무섭노?
  영호 자리 이탈하지 말랬잖아요?
박상병 시팔, 우리가 뭐 전쟁하나? 야, 몇시나 됐노?
  영호 시계 없는데요.

                 (투투투……투투투투…… 멀리 어둠 속 어디선가 총소리가 들린다.)

박상병 이게 무슨 소리고? 총소리 아이가?

                 (총소리는 연거푸 계속된다. 그와 함께 확성기 소리도 점점 크게 들려           온다. 어느 젊은 여자의 목소리다.)

박상병 봄인데 와 이렇게 떨리노? 미치겠네……

                 (그는 실제로 몸을 덜덜 떨고 있다.)

박상병 야, 김영호! 니 이야기 해봐라.
  영호 무슨 이야기요?
박상병 아무 이야기나. 여자 이야기. 박하사탕 이야기.
  영호 ……
박상병 편지 보낼 때마다 봉투에 박하사탕 넣어보내는 여자 있잖아.

                 (그 동안에도 어둠을 뚫고 어떤 젊은 여자의 확성기 소리가 계속 들                  려온다. 그녀는 끝없이 뭔가를 애절하게 외쳐대는데, 너무 먼 곳에서                   바람결처럼 전해지고 있어서 무슨 소린지는 알아들을 수 없다. 그리                  고 그 소리를 지워버리듯, 투투투……투투투투……총성이 들려온다.                   총성은 더 가까워졌다.)

박상병 와, 미치겠네. 오줌은 또 와 이래 마렵노? 미치겠네……

                 (그는 어둠 속으로 기어간다. 영호, 그의 뒷 모습을 보고 있다가 다시            전방을 주시한다.)

                 (어둠 속의 골목길. LONG SHOT.
                 잠시 총소리가 그친 것 같다.)

                 (무슨 소리에 정신을 차리는 영호. 자신도 모르게 M16소총의 노리쇠                  를 장전한다. 차가운 금속성 소리가 어둠을 날카롭게 울린다.)

  영호 누구야!

                 (눈 앞의 어둠속.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분명 누군가 있다.)

  영호 누구야!

                 (어둠 속으로부터 누군가 전신주 외등 불빛이 만든 작은 빛 속으로                   조심스럽게, 두려움으로 사로잡힌 걸음걸이로 걸어들어온다. 이제 빛                   속에 오두마니 서 있는 한 여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약간 역광이지                  만, 분명 그것은 순임의 모습이다.)

  영호 (너무나 놀라 소리가 목구멍에 걸려 잘 나오지 않는다) 수, 순임씨?

                 (그러나 순임은 대답이 없다.)

  영호 ……누구야?

                 (순임, 앞으로 몇 걸음 걸어온다. 전신주의 외등 불빛을 벗어나 어둠                   속으로.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실루엣이 카메                  라 앞으로 다가와 선다. 후랫시 불빛이 어둠 속에서 불안스럽게 그녀                  를 포착한다. 후랫시 불빛에 사로잡힌 얼굴은 놀랍게도 순임이 아니                  라 잔뜩 겁에 질려있는 어느 여고생이다.)

여학생 아, 아저씨…… 살려주세요…… 나 학생이예요.

  영호 (그는 아직도 충격에서 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학생이,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여학생 우리 고모집에 갔다가요, 우리 고모집이 요 뒤에거든요.(뒤쪽을 가리                  킨다. 공포에 질려 그녀는 정신없이 말을 쏟아놓는다.) 우리 고모집에            갔다가 늦었어요. 지금 안 가면 우리 엄마 혼구녕 낼 거예요…… 아                  저씨, 보내주세요. 네?
  영호 학생 집이 어디야?
여학생 저기요. (앞쪽 어딘가를 가리킨다.) 여기서 얼마 안돼요. 금방 갈 수                   있어요.
 
                 (영호, 어떻게 할까 망설인다.)

여학생 죄송해요, 아저씨. 용서해주세요.(울면서 두 손을 비비며 애원한다.)                   보내주세요. 네?
  영호 (이윽고) 빨리 가. 군인들한테 잡히면 큰일나니까 빨리 가.
여학생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연신 머리를 숙여 인사한다.)
  영호 빨리 가.

                 (그때 뒤에서 박상병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박상병 야, 김영호! 뭐야?
  영호 (여학생에게 다급하게 손짓한다.) 빨리 가!

                 (그러나 여학생은 못 알아듣는 것처럼, 또는 겁에 질린 것처럼 그 자                  리에 서 있다.)
                
  영호 빨리 가라니까!
박상병 (가까이 다가왔다.) 이거 누고?

                 (영호, 여학생을 향해 총을 발사한다. 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쫓기 위                  한 것이다. 그제야 여학생 돌아서서 뛰기 시작한다.)

박상병 뭐야, 씨발! 잡아!
 
                 (영호, 다시 총을 쏜다. 어둠 속을 달려가던 여학생이 쓰러진다.
                 영호는 그녀가 뭔가에 걸려 쓰러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는                   일어나지 않는다. 눈앞에는 막막한 어둠 뿐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

            (영호는 천천히 어둠 속으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CAMERA, 그의 얼굴           을 잡으며 트래킹한다. 여학생 쪽으로 한발짝씩 가까이 갈수록 그의                   표정은 점점 공포에 사로잡힌다. 이윽고 천천히 허리를 굽힌다.)

                 (그의 앞에 쓰러져 있는 여학생이 있다. 그는 여학생을 안아 일으킨                  다.)

  영호 얘, 일어나. 빨리 일어나서 집에 가……

                 (여학생의 몸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의 얼굴은 극도의 공포에 사로           잡혀서 거의 숨조차 쉬지 못할 지경이다.)

                 일어나, 빨리……  집에 가야지……

                 (그에게 후랏쉬 불빛이 다가온다. 여학생을 안고 있던 영호, 불빛을                   쳐다본다. CAMERA 후랏쉬 불빛의 시점으로 다가간다.)

  영호 (거의 흐느끼듯 정신없이 중얼거린다) 빨리 집에 가…… 빨리……

                 (눈부신 불빛에 사로잡힌 그의 얼굴과 손에 붉은 피가 묻어 있다. 그                  는 계속 뭔가 중얼거린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던 애절한 젊은 여자의 목소리, 허공을 감돌면서            점점 크게 들려온다. 이제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다.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간절한 슬픔에 가득차 있다.)

목소리 시민 여러분…… 사랑하는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군인들이 들어           오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형제 자매들이 군인들의 총칼에 쓰러지                  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광주 시민 여러분……

114. 위병소 앞 (외부. 오후)----------------------------------------------

                 (부대 위병소 앞. 비가 오고 있다.
                 위병소 처마 밑에는 순임이 오두마니 서서 떨어지는 빗발을 쳐다보고            있다. 빗속에 먼 길을 걸어온 듯 머리칼이 젖어 있다. 접어든 우산에                  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아무래도 그녀는 오늘도 허탕을 친 것같다.)

                 (멀리 휑하게 비어진 연병장, 산밑에 엎드린 부대막사들, 그 풍경들                   위로 사선을 그으며 떨어져 내리는 무수한 빗발. 그 모든 것들은 이                  상할 정도로 무서운 정적에 잠겨 있는 것 같다.)

                 (말없이 빗발을 바라보는,
                 절망적인 순임의 얼굴에서 천천히 F.O.)

115. 열차 (외부. 낮)----------------------------------------------------

                 (수초 동안의 암전 상태가 지난 뒤,
                 짧은 F.I.과 함께 달리는 열차의 시점에서 보는 풍경. 비가 오고 있다.
                 천천히 다가오는 선로 좌우 숲의 초록 빛깔이 가늘은 빗발에 지워진                  다. 기차는 고속촬영처럼 비현실적인 속도로 느리게 달려도 상관없다.
                 과거로, 과거로 달리듯 다가오는 빗 속의 풍경과 함께……
                 다시 천천히 F.O.)

116. 작은 타이틀 (BLACK,  무지) ----------------------------------------
                
                 (어둠 속에서,
                 '소풍'이라는 자막이 떴다가 사라지고, 이어서
                 '1979년 가을'이라는 자막이 다시 떴다가 천천히 사라진다.)


(이제 우리는 마침내 영화의 종착지이면서 맨 처음의 시간, 한 인간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순간에 도착하게 된다.)


117. 야외 (외부. 낮)----------------------------------------------------

                 (씬3과 같은 장소. 영화가 시작된 바로 그곳. 둑길을 따라 이어지는                   가을 빛깔이 가슴 저리도록 아름답다.
                 이 장면의 화면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능한 한 밝은 톤이어야 한다.)

                 (10여 명의 젊은이들이 소풍을 나왔다. 그들은 구로공단 내에 있는 어           느 교회의 노동자 야학에 함께 다니는 젊은이들로 모두 십대 후반 또           는 이십대 초반 쯤으로 보인다.
                 그들은 모두가 그 나이에 걸맞게 얼만큼 서툴고 수줍으며, 꾸밈없어                   보인다.
                 옷차림 역시 가난하고 소박하다. 교련복 같은 것을 걸치고 있는 친구                  도 있고, 누군가는 손에 통기타도 들고 있다. 올망졸망한 먹을거리를                   손에 든 채 여자들은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삼삼오오 짝을 지은            채 걷고 있다.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실없이 말을 걸고 여자들은 가끔            남자들 쪽을 돌아보며 킥킥 웃기도 한다.
                 그 속에 영호의 모습도 보인다. 물론 군대 가기 전, 갖 스무 살의 모                  습이다. 영호는 몇 걸음 앞서서 걷고 있는 순임을 은근히 좋아하는                   눈치다.
                 그는 자주 그녀를 향해 눈길을 보낸다. 다른 여자친구와 함께 걷고                   있는 순임 역시 무심한 척 하며 영호에게 시선을 보낸다.)

                 (영호가 그녀의 곁에 다가갔을 때, 불쑥 순임이 뭔가를 영호에게 내민           다.)
                
  순임  이거 드실래요?
                
                 (하얀 사탕이다. 영호는 순임이 내민 사탕을 받아들고 포장지를 벗긴                  다.)

  영호 무슨 사탕이죠?
  순임 박하사탕이요.
  영호 박하사탕…… 이거 귀한 건데.

                 (순임과 팔짱을 끼고 가던 친구가 거든다.)
 
   친구 얘, 제과공장에 다니잖아요. 얘는 이런 걸 하루 천개씩 싼대요.

                 (영호, 사탕을 입안에 넣고 깨문다. 사탕의 맛보다 순임이 자신에게                   분명한 호감과 관심을 표현했다는 사실이 너무 기쁘고, 가슴을 뛰게                   한다.)

118. 언덕 (외부, 낮) ---------------------------------------------------

                 (어느새 그들은 언덕 끝에 다달았다.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비탈길이 있고, 그 아래로 강이 보인다. 넓은                   자갈밭과 잔잔하게 햇빛을 반사하는 강물이 보이고 멀리 철교도 보인           다. 순임은 영호보다 몇 걸음 앞서서 걸어가고 있다. 영호는 그 뒤를                   따라가며 몇번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그녀를 부른다.)

  영호 순임씨!

                 (그녀가 돌아본다.)

  영호 나 조금 전에 세상에서 최고로 맛있는 걸 먹었어요.

                 (그녀의 얼굴이 보일락말락 붉어진다.)

  순임 고마워요.

119. 비탈길 (외부, 낮) --------------------------------------------------

                 (비탈길을 걸어 내려가는 사람들. 순임은 일행의 맨 뒤에 처져 있다.
                 몇 걸음 앞에서 영호가 혼자 뒤처져서 허리를 굽힌 채 무엇인가 들여           다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친구들은 저만큼 앞서서 걸어가고 있고, 이제 이 언덕길에는 두 사람                  만 남은 것 같다. 가까이 다가가자, 영호가 하는 짓이 좀 묘하게 보인                  다. 그는 검지와 엄지를 기역자로 만든 두 손을 맞붙여 손가락 사각                  형틀로 사진 찍는 시늉을 하고 있다. 그가 찍고 있는 것은 풀섶에 한            무더기 피어있는 들꽃이다.)

                 (순임이 그에게 다가간다.)

  순임 뭐하세요?
  영호 사진 찍는 거예요.

                 (그는 계속해서 그 손가락 프레임으로 이리저리 꽃을 찍듯이 하다가,            그걸로 순임의 얼굴을 본다.)

  영호 나중에 사진가가 되고 싶어요. 이런 꽃들, 이름없는 예쁜 야생화만 찍                  는 사진가가 될 겁니다. 돈을 벌면 맨먼저 사진기부터 살려고 그래요.

                 (영호의 손가락 프레임 속에 담긴 순임의 얼굴. 감동한 듯 웃고 있는            그 얼굴이 눈부시다.)

                 (두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한다. 문득 영호가 걸음을 멈춘다.)

  영호 이상해.

                 (순임이 그를 쳐다본다.)

  영호 진짜 이상해요. 나 분명히 여기 처음 왔거든요. 그런데 옛날에 꼭 한                  번 와본 것 같아요. 저 강, 저 철교……생전 처음 온 곳인데…… 너무                  나 낯익어요. 이 길도 내가 언젠가 걸어본 길이고. 여긴 분명히 내가                   너무 잘 아는 데예요.
  순임 그럴 때가 있어요. 그런 건요, 꿈에서 본 것이래요.
  영호 정말 꿈이었을까요?

                 (영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본다.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 반짝이는 강, 숲…….)

  순임 영호씨 그 꿈이 좋은 꿈이었으면 좋겠어요.

                 (그 말을 남기고 순임은 친구들에게 뛰어간다. 영호는 그녀의 뒷 모습           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가 남긴 그 한 마디가 것은 그를 너무나 감동시킨다. 그 순간 그                  는 자신의 인생에서 전에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무엇인가 비로소            시작되었음을 느낀다.)

120. 강변 자갈밭 (외부, 낮) ---------------------------------------------

                 (강변의 자갈밭 평평한 곳에 자리잡은 젊은이들. 둥그렇게 원을 그리                  고 앉아 놀이를 하고 있다. 그들의 놀이 역시 첫 장면과는 너무나 다                  르다. 그들은 빙 둘러앉아서 손뼉을 치며 노래 부르고 있다. 산울림의            <나 어떡해>. 누군가는 통기타로 신나게 반주한다.)

                 나 어떡해, 너 갑자기 떠나가면……

                 (그들은 마냥 흥겹고 즐겁게 노래한다.
                 영호와 순임은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다. 웃고 노래하면서도 때떠로                   그들의 눈길이 잠깐씩 마주친다. 그들 두 사람만이 느끼고 알 수 있                  는 감정이 그 짧고 수줍은 눈길 속에 있다. 영호는 너무나 행복하다.
                 그녀의 눈빛,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넘기는 부드러운 바람, 친구들의                   노래소리, 투명한 하늘, 강물을 반사하는 햇빛…….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아름답다. 젊음도 아름답고 인생도 아름답다. 그                  는 슬그머니 일어나 자리에서 빠져나온다. 친구들의 노래소리가 그의            뒤를 따라온다.)

                 그건 안돼, 정말 안돼, 가지 말아……

                 (자신의 가슴을 가득 채운 행복감과 아름다움을 혼자서만 느껴보고                   싶은 듯, 영호는 친구들로부터 떨어져 걸어간다.)

121. 철교 밑 (외부, 낮) -------------------------------------------------

                 (영호, 철교 아래쪽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하늘을 쳐다보고 주위를 둘러본다. 그리고 몸을 눕힌다. 저만치 친구                  들이 왁자하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슬그머니 카메라 쪽으로 몸                  을 돌려 누워 뭔가를 들여다본다. 자갈 사이에 피어있는 이름모를 앉                  은뱅이 들꽃 한 송이다. 아주 소중한 물건을 보듯, 그는 그 들꽃을 들                  여다본다.
                 행복감에 가득찬 해맑은 그의 얼굴로 카메라가 서서히, 아주 서서히                   다가간다.
                 이제 그의 얼굴이 화면에 가득찼다. 멀리 그의 뒤로 친구들이 놀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그들의 노래소리, 웃음소리 등이 꿈결처럼 들려                  온다.)

                 다정했던 네가, 상냥했던 네가, 그럴 수 있나……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카메라는 고정된 채로 그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막 난생 처음 순수한 사랑을 시작한, 일생 동안 단 한 번                  밖에 맛볼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기쁨과 감동을 느끼고 있는 한 젊은                  이의 얼굴이다.
                 멀리 기적소리가 들려온다. 문득, 그의 시선이 하늘로 향한다. 기차소                  리는 점점 가까워진다. 마치 알 수 없는, 다가올 그의 전생애처럼.
                 그의 얼굴은 여전히 젊음과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순수한 행복감으로            가득하다. 그 행복감이 너무 가득차서 넘쳐나는 걸까.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이다가, 그것이 천천히 흘러내린다.
                 한 줄기 맑은 눈물이 그의 여윈 볼에 이르렀을 때, 화면 스톱된다.
                 점점 육박해오며 고조되는 기차 소리와 함께,
                 천천히 F.O.)

                 (평화롭고 맑은 음악과 함께 크레딧이 올라간다.)

                                                                ---제1고. 1998년 9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