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5일 목요일

여수·순천 사건 / 여순사건





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 줄여서 여순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2개월 뒤인 1948년 10월 19일,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를 비롯한 일련의 남로당 계열 장교들과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에 반대한 군부대가 주동하여 2,000여 명의 군인이 전라남도 여수에서 봉기함으로 인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좌·우익 세력으로부터 전라남도 동부 지역의 많은 민간인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반란군에 의해 경찰 74명, 우익 인사 16명을 포함해 약 150여명의 민간인이 학살됐고, 정부 진압 군경이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최소 439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1]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은 철권 통치와 반공주의 노선을 강화하였다.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여수·순천 주둔군 반란 사건, 여순반란사건, 여순봉기, 여순군란이라고도 한다. 과거에는 여순반란사건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았으나, 지역 주민들이 반란하였다고 오인될 소지가 있다는 비판을 받아들여서 1995년부터 여수·순천 사건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1948년 국방경비대(대한민국 국군의 전신)는 모병제였고, 다양한 방법으로 입대 시 신원조회를 하는 지금과 달리 신원조회가 허술했기 때문에 경찰의 탄압을 받았던 좌익계열과 친일 지주에 반감을 품은 소작농, 빈곤층 노동자들의 자식들이 신분상의 보호를 받기 위해 입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건군 초기 미 군정은 군인이 정치적 견해를 갖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제재를 가하지 않고, 완전한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었다. 남로당에서 군을 장악하기 위해 일부러 위장입대시킨 요원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군내에서 많은 동조자를 포섭했다. 여기에 당시 군과 경찰은 국가주도권을 놓고 무장충돌을 벌일 정도로 매우 관계가 좋지 않았다.

이 사건은 당시 여수에 주둔중이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에서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기 위하여 1개 대대 규모의 군인들을 파견하기로 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14연대의 반란과 진압[편집]
1948년 10월 19일 : 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국방경비대 14연대의 일부 군인들이 무장봉기을 일으키고,친일 전력 경찰과 우익을 자처하는 친일 경력 인사들을 살해했다. 이 과정에서 여수경찰서장과 사찰계 직원 10명, 한민당 여수지부장, 대동청년단 여수지구위원장, 경찰서후원회장 등을 포함한 우익계 인사와 그 가족 70여 명이 살해되었다. 반란군은 여수를 점령한 후 순천시로 이동해 중위 홍순석이 지휘하는 14연대 2개 중대 병력과 결탁해 순천을 장악하고는 살인,약탈,방화 등을 저질렀다.
10월 21일 : 반란군이 벌교, 보성, 고흥, 광양, 구례를 거쳐 10월 22일에는 곡성까지 점령하였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10월 21일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송호성 준장을 총사령관에 임명해 10개 대대 병력을 이끌게 하고는 진압을 명령하였다.
10월 22일 : 진압군이 오후 3시에 순천 공격을 시작하였다. 반란군의 주력은 광양 및 인근 산악지대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10월 23일 : 진압군이 오전에 순천을 장악하였다. 진압군은 순천 장악 직후 일사천리로 광양 일대의 반란군 주력을 섬멸하고, 여수를 탈환하기 위한 2단계 작전에 들어갔다. 하지만 반란군은 여수의 입구인 미평 근처에 매복, 진압군을 습격했다. 이로 인해 사령관 송호성 준장이 철모에 총을 맞고 장갑차에서 떨어져 고막이 터지고 허리부상을 입었다. 이 와중에 반란군의 주력이 백운산과 지리산으로 도망쳤다.
10월 25일: 진압군의 여수 시내에 대한 박격포 사격을 시작으로 시가전이 이틀 동안 계속되었다.
10월 27일: 진압군이 여수에서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였다. 진압군과 경찰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대규모 협조자 색출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최소 439명의 민간인들이 억울하게 살해당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극우 연루설 유포[편집]
여순 사건 직후, 이승만 정부는 극우 세력 (당시 극우는 민족주의자를 칭함 오늘날처럼 반공주의가 아님) 일부가 이 반란에 동조했다는 주장을 유포하고, 내무부는 경찰국에 수사를 지시하였다. 당시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었던 이범석은 10월 21일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먼 몰락 극우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 벌인 정치적 음모"라며 사실상 김구를 지목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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